로고


보도자료

[오마이뉴스] 노신 등 진보문인들과 항일운동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19 16:34 조회9,667회

본문

[운암 김성숙 평전 20회] 1900년대 동양은 일본제국주의라는 악귀 때문에 평온한 때가 없었다 


66f6c7cf32230add6bc987af813aec95_1566199979_29.jpg


▲ 운암 김성숙 선생과 두군혜 여사 운암 김성숙 선생과 두군혜 여사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일제는 1931년 9월 19일 만주를 침략하여 동북지방을 삽시간에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의 목표는 "만주점령→친일괴뢰정권 수립→만주국으로 독립→일본의 영구귀속" 이라는 시나리오였다.

일제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를 괴뢰정권의 수반으로 옹립하면, 만주족이 한족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난 그를 추앙하여 자신들에게 쉽게 복속할 것으로 판단했다. 착오였다. 


일제의 만주침략에 중국인들은 격렬하게 반대하고, 만주지역 인민들도 쉽게 복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개석은 일제와 싸우는 것을 여전히 주저하였다. 오히려 공산당을 주적으로 삼아 공산당 타도에 열중했다. 일제는 별다른 저항없이 1932년 3월 만주에 괴뢰정부를 수립하였다. 그야말로 친일 허수아비 정부다. 


손쉽게 만주를 집어삼킨 일제의 야욕은 중국대륙 중심부로 침략의 마수를 뻗치고, 1932년 2월에는 3개 사단 병력을 투입하여 상하이에서 중국군을 외곽으로 밀어내기에 이르렀다. 영국ㆍ프랑스ㆍ미국ㆍ이탈리아의 조계가 있는 상하이까지 점거한 것이다. 일제는 상하이 침공 과정에서 다수의 중국인을 학살하였다.

김성숙과 두군혜는 일본군이 침공한 상하이에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노신ㆍ모순ㆍ정령(丁玲) 등 중국좌익작가연맹의 지도자들과 연명으로 일제의 상하이 침공과 민중학살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전시 특별 간행물 『봉화』와 『반일민중』이라는 신문의 편집을 맡아서 시민들의 반일감정을 고취하는 논설을 썼다.

또한 『일본경제사론』, 『통계경제론』, 『산업합리화』, 『중국학생운동』, 『변증법전정(全程)』 등 경제ㆍ정치ㆍ철학 등의 책을 번역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아쉽게도 그가 번역한 책은 남아 있지 않아서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제목으로 보아 사회주의 계열의 저서인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김충창은 언론 출판 일에 종사하며 파시즘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번역하였다. 그는 식민지의 학생 문제와 그 밖의 여러가지 주제에 대한 논문을 묶은 훌륭한 책을 내었다. 또한 여러가지 필명을 사용하여 도합 스무 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한국 혁명의 중요한 이론적 지도자이다.

그는 비밀이 요구되는 일은 결코 좋아하지 않았고 공개적인 활동을 즐겨 하였다. 그것이 그의 특성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백색 테러 기간에 적극적인 지하 활동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석 5) 


혁명가는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안다. 그리고 생명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 김성숙은 의열단의 단원이다. 의열단 '공약 10개조'의 8항은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을 명시한다. 함부로 죽지말라는 뜻이 담긴다.

김성숙은 1932년 1년여 동안 광서성 사범대학 교수로 교단에 섰다. 중국의 젊은 교사 예비생들에게 한ㆍ중의 역사와 일제의 침략상을 가르치고 다양한 인사들과 교우관계를 맺었다.

김성숙의 이론 수준은 꽤 높았던 것 같다. 이론가로서의 소양은 중산대학 정치학과에서의 공부를 통해 이미 쌓았고, 또 실제의 정치 투쟁을 통해, 그리고 꾸준한 독서와 집필 생활을 통해 두터워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더하여, 많은 지식인들 및 혁명가들과의 교우가 그의 이론적 깊이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재명은 다음과 같은 정보를 우리에게 준다.

"광동에서 김성숙은 상당수에 이르는 외국의 급진적 지식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미국의 얼 브라우더(Earl Browder)와 소련의 보로딘도 끼어 있었다. 보로딘은 중국국민당의 고문으로서 파견된 무게 있는 인물이었다. 한편 인도차이나와 인도 및 대만 등에서 온 혁명가들과도 민족 독립의 방안을 놓고 토론하였다." (주석 6) 

단재 신채호는 베이징에서 애국여성 박자혜와 혼인하면서 "직업이 독립운동이니 부인과 가정에 소홀하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였다. 독립운동가나 혁명가는 누구할 것 없이 가족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김성숙은 이국 여성과 혼인하고 얼마 후 아들이 태어났지만, 가정사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그에게는 학업과 당장의 중국혁명과 이를 통한 한국의 독립이라는 과제가 겹겹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혁명 못지않는 격정과 달콤함이 따른다. 세계혁명사의 주역 중에는 사랑을 혁명과 동렬에 놓은 전사들이 적지 않았다. 김성숙의 연인도 혁명과 사랑을 같은 비중으로 여겼다. 일본유학 3개월 만에 귀국한 것은 김성숙이 3주 동안 답장을 보내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그 아가씨는 매일같이 자기 연인에게 편지를 썼고 세 달 후에는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 김충창이 삼주일 동안이나 답장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광동에서 김충창을 만나지 못하자 그녀는 대단히 놀래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지금 무한에 있어요. 하지만 비밀을 지켜주십시오. 한달 후면 돌아올 것입니다."하고 나는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무한으로 가려고 하였다.

이 아가씨가 진정한 혁명가가 아니라 유감이기는 했지만 나는 속으로 김의 행복한 연애사업을 진심으로 부러워하였다. 내 결혼관은 눈에 띄게 변하였다. - 아가씨만 이상적이라면 연애를 해도 괜찮다. 김충창의 연인은 내 결혼관을 결혼 쪽으로 바꾸어 놓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으며 나에게 자기 친구들을 많이 소개해 주었다. (주석 7) 


김성숙은 전란기 상하이에서도 중국의 저명한 문인들과 더불어 반일활동을 하는 등 치열한 독립운동의 신념을 접지 않았다. 그렇지만 님 웨일즈의 눈에는 그가 예쁜 이국여성에 너무 깊히 빠져서 항일투쟁에 소홀했던 것처럼 비쳤다. 이 시기 그에 대한 자료가 흔치 않는 터이라, 다소 긴 내용을 소개한다.

김충창은 여전히 광동 출신 부인에게 아주 깊이 빠져 있었으며, 두 사람은 아기가 태어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상해에 머물러서 책이나 논문을 저술하기를 바랐다. 언제나 내 문장 실력을 크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행동을 원했으므로 당시는 이론 문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너는 잠시 동안 직접적인 행동을 중지하고 휴식을 취해야 하네. 요즘처럼 백색 테러가 자행될 때는 어떡하든 살아남아서 장차 중요한 일을 지도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해. 네가 여기서 이론적 작업과 연구를 하는 동안 너를 먹여 살리는 데 드는 돈 정도는 내가 충분히 벌수가 있어" 하고 김은 나에게 충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쓰디쓰게 말하였다.

"당신은 너무 행복에 겨웁군요. 결혼하더니 당신은 변했어요. 나는 지금 실제적인 투쟁을 그만둘 수가 없어요. 더 강화하고 싶은 심정이랍니다."

결혼을 하더니 김충창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전에는 아무데나 자유로이 돌아다녔던 것이다. 이 아가씨를 만나지 않았었더라면 그는 절대로 뿌리를 내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 집에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글쓰는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나는 내 가장 친한 친구를 빼앗겨 버렸다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지가 못했다. 내가 상하이를 떠나기 두 주일 전에 김과 그의 부인은 나의 이런 태도에 화를 내었다.

하지만 그 후 김은 나를 찾아와 솔직히 시인하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사랑은 참으로 사람을 크게 변화시키는 것이라네. 하지만 지금 나를 질책하지 말게. 그대가 아가씨를 알게 된다면 나보다도 훨씬 깊이 빠져들어갈 것일세."

"나는 절대로 결혼 안 해요."하고 나는 선언하였다.

"어떤 아가씨도 내 적극적인 혁명 활동의 자리에 대신 들어설 수가 없어요. 당신에게는 자유가 없어요. 당신 부인은 따뜻한 분이긴 하지만 그러나 혁명가는 아닙니다. 당신이 그녀를 감화시켜야지 그녀의 감화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래, 네 말이 옳아. 하지만 그대는 한 번도 여자를 감화시키려고 해본 적이 없잖아. 그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세."

내가 상해를 떠나며 김충창에게 작별 인사를 할 때, 우리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지금 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너무나도 위험이 커"하고 김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주석 8)

주석
5> 앞의 책, 130쪽.
6> 『이정식 면담록』, 91쪽.
7> 님 웨일즈, 앞의 책, 129쪽.
8> 앞의 책, 186~1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