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919년, 독립을 향한 열망은 상해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 깜짝 놀란 일제는 더 많은 밀정을 투입해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한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독립운동가를 밀정으로 회유하는 전략을 세운다.
그 전략의 선봉에 있던 사람은 1918년부터 2년간 조선군 총사령관을 지낸 '우쓰노미야 다로', 사이토 총독에 이은 2인자로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군 최고 지휘관이다.
〈'우쓰노미야 다로'의 공작..."임시정부를 파괴하라"〉
우쓰노미야 다로 조선군 총사령관(1918~1919)
그의 공작 과정은 그가 남긴 일기에 고스란히 적혀있다. 그는 '배일거두(排日巨頭)', 즉 유명 독립운동가를 집으로 불러들여 수차례 밀정으로 회유한다. 그의 공작 대상 중 한 명이 당시 독립운동가 '김복', 우쓰노미야는 그를 다섯 번이나 직접 만났다. 노모에게 선물을 사주라며 100엔을 주기도 했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어림잡아도 수백만 원 이상의 거금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쓰노미야는 김복에게 임무를 내린다.
"상해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독립운동가를 회유하라"
밀정에 포섭된 것으로 의심되는 김규흥
우쓰노미야 일기에는 김복의 본명이 '김규흥'이라고 정확히 적혀있다. 범재 김규흥, 중국 신해혁명에 참여했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한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김규흥의 이 같은 행적이 알려지자 학계에선 친일 논란이 불거졌다.
취재진은 상해로 돌아간 김규흥이 우쓰노미야에게 보낸 편지에 주목했다. 취재 결과, 편지 원본은 우쓰노미야의 후손들이 보관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우쓰노미야의 일기는 세상에 공개됐지만, 그가 보관하고 있던 서한들은 아직 공개된 적이 없다. 취재진은 후손에게 수차례 취재 협조를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취재진은 국내 한 연구자가 최근 이 편지를 입수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배경한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는 취재진에게 편지 일부를 공개했다. 후손 측의 동의가 없어 전문을 모두 공개하진 않았다.
김규흥이 우쓰노미야에게 보낸 편지
김규흥은 편지에서 조선과 일본이 하나임을 뜻하는 '일선융화'를 역설했다. 또 상해임시정부의 동향을 보고하고, 거액의 돈을 요청하기도 했다.
"상해임시정부는 200명이었으나 대부분 귀국하고, 현재 남은 사람은 60명입니다. 이중 극렬분자는 40명에 이릅니다.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선 20~30만 엔이 필요합니다."
훗날 밀정으로 밝혀져 처단된 '김달하'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김달하와 함께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을 북경에 모아서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계책을 갖고 있습니다. 활동비로 김달하에게는 3만 엔, 저에게도 2만 엔을 주시길 바랍니다."
밀정 김달하와의 긴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활동이 소문났는지, 자신이 의심받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함께 전한다.
"상해에 있는 단원들로 인해 때때로 강박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밀활동이 드러나 난처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잠시 다른 곳으로 피신합니다."
국립현충원 김규흥 묘역
배경한 교수는 "김규흥의 업적을 발굴했던 사람으로서 편지 내용은 경악스럽고 놀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규흥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일제의 공작에 걸려든 김규흥, 그는 이후 은행을 설립하지만, 자금난으로 2년 만에 문을 닫은 뒤 1920년대 후반부터는 행적이 잘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1936년 중국에서 숨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의열단원의 밀고..."김원봉은 북경을 거쳐 광동으로 향했다"〉
1920년대 초, 상해임시정부와 함께 일제가 가장 주시하던 조직은 의열단이었다. 그중 검거 1순위는 단연 의열단장 김원봉, 그를 잡기 위해 청부살인까지 의뢰하던 일제는 아예 의열단원을 밀정으로 포섭했다.
밀정으로 포섭된 김재영의 보고 문서
취재진이 입수한 일본 기밀문서에는 의열단원이 됐다는 밀정의 보고가 그대로 담겨있다.
"일본 총영사관 통역관 오다 미쓰루의 지시에 따라 의열단원에 가입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함께 한구로 왔고, 김원봉은 북경을 거쳐 광동으로 향했다."
모든 것이 기밀로 취급받던 의열단 내부 정보도 상세히 밀고됐다.
"김원봉은 러시아 정부와 선전비를 둘러싼 교섭을 진행 중이다. 이달 안으로는 선전비 일부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상해 프랑스 조계 삼일공학에서 의열단 총회가 개최될 것이다. 참석자는 40~50명이다."
이런 기밀 정보를 밀고한 사람은 누구일까. 보고자는 의열단원 김호, 본명은 김재영이다. 의열단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행적이 묘연한 김재영은 언제, 어디서 숨졌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완장엔 붉은 선 두 줄, 견장은 파란색"... 홍범도 측근 중에도 밀정〉
일제의 밀정 공작 대상은 상해임시정부부터 의열단 등 독립운동 진영을 총망라했다. '백두산 호랑이'로도 불렸던 무장 투쟁의 한 축, 홍범도 장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자랑스러운 봉오동 전투의 주역인 그는 전투가 있기 약 10년 전부터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홍범도 장군 등 독립군에 대한 밀정의 보고 문서
취재진이 입수한 일본 기밀문서. 1912년 작성된 이 문서에는 홍범도의 부하가 밀고한 내용이 나온다.
"홍범도는 부하 500여 명과 총기 500자루, 차도선은 300명에 300자루를 갖고 있습니다. 홍범도는 러시아 말을 타고 있고, 복장은 갈색입니다. 팔에 차는 완장에는 붉은색 선 두 줄이 둘려 있고, 어깨에 차는 견장은 청색이고 통령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사는 은신처의 위치도 상세히 적혀있다.
"혜산진 대안 일리에서 약 30리 떨어진 신약수동에 살고 있다. 사람의 눈을 피하려고 일부러 이 지역의 동북쪽에 있는 사헌부락에 가옥을 지었다."
카자흐스탄 이주 당시 홍범도 장군
이런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에도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뒤,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새로 쓴 홍범도 장군의 마지막 직업은 극장 문지기로 알려져 있다.
끊임없이 밀정을 투입하며, 독립운동 내부의 분열을 유도한 일본. 독립운동가와 그 주변을 포섭하고, 회유하면서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36년간의 일제 치하 당시 일본의 핵심 전략은 바로 '밀정'이었다.
이세중 기자 center@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