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김성숙 평전 19회] 혁명가에게 안주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성격 탓일까.
▲ 운암 두군혜 가족사진. 김성숙의 중국가족과 동지들. 가운데 김성숙과 두군혜 부부가 서있고, 오른쪽이 박건웅이다. 운암 두군혜 가족사진. 김성숙의 중국가족과 동지들. 가운데 김성숙과 두군혜 부부가 서있고, 오른쪽이 박건웅이다.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국민당정부의 백색테러를 피해 은신했던 김성숙은 1928년 말 두군혜와 광주를 탈출하여 홍콩을 경유하여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 시기 중국대륙은 모택동의 홍군이 1929년 10월 강서성 정강산에 혁명 근거지를 건설하고, 11월 광동성에 최초의 소비에트를 수립했으며, 1928년 4월 북벌을 재개하고, 6월에는 북벌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홍군에 밀리던 장개석은 1928년 10월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7년 3월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고, 1930년 1월에는 김구ㆍ안창호ㆍ조소앙ㆍ조완구ㆍ이시영 등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 등 오랜 침체기에서 벗어나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1927년 1월 좌우합작으로 신간회가 발족되고, 5월에는 여성운동 통일체 근우회가 결성되었으며, 1928년 1월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 9월 간도공산당사건이 터졌다. 1929년 1월 원산에서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였다. 만주에서는 3월 독립운동단체 정의부ㆍ참의부ㆍ신민부가 통합하여 국민부를 조직하였다.
상하이로 탈출한 김성숙은 임시정부는 물론 다른 독립운동단체에도 참여하지 않고 한동안 글쓰기와 번역으로 휴면기에 들어갔다. 망명 이래 그동안 몇차례나 사선을 넘나들며 활동하느라 많이 지치기도 했을 터였다.
"1928년부터 1934년까지 7년 동안의 시기는 김성숙으로서는 사상적 모색기이자 지적활동에 몰두하면서 대중조직에서 활동하는 이른바 재충전기였다." (주석 1)
▲ 김성숙과 세아들 김성숙과 세아들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혁명가에게 안주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성격 탓일까.
김성숙은 오래지 않은 1930년 봄, 상하이에서 아내의 고향인 광주로 갔다. 도시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어서 중산대학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고, 학교를 졸업하였다.
광주에서 그는 현지신문인 『민국일보(民國日報)』 기자로 활동하고, 모교인 중산대학 일본어 번역계에 초빙되어 근무하였다. 얼마 뒤에는 시내 문명로(文明路)에 있는 일어연구소에서 일본어 교수를 지냈다.
하지만 광주의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 해 8월에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부인과 함께 중국공산당 산하의 혁명문학운동 단체인 중국 좌익작가연맹(좌련)에 가입하고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1930년 3월 설립된 좌련은 중공당이 지도한 좌익문화단체로 반제, 반국민당 반동파, 소비에트혁명 옹호의 기치를 내걸었다. 때문에 좌련의 구성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중공당원이었다. 좌련은 1936년 초 일제의 화북침략으로 중일전쟁의 기운이 높아지자 문화단체의 통일전선을 위해 해산되었다." (주석 4)
김성숙 부부의 '좌련' 가입과 활동은, 당시 중국사회에서도 이색적이었던지 기관지 『좌련사(史)』에서 소개할 만큼 각광을 받았다. 이들 부부는 상하이에서 차츰 보폭을 넓히며 다양한 활동에 나섰다. 특히 '좌련'을 통해 중국의 진보적인 혁명문인 노신과 모순(茅盾) 등과 함께 문학창작 및 이론비평 활동을 전개하였다.
주석
1> 김광재, 「김성숙의 1930년대 중국 관내 지역의 독립운동」, 『운암 김성숙의 생애와 사상』, 95쪽.
2> 님 웨일즈, 앞의 책, 186쪽.
3> 님 웨일즈, 앞의 책, 187쪽.
4> 김광재, 앞의 책, 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