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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중국인 반씨 집'보다 더 정확한 의열단 창립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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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23 09:58 조회10,84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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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왔습니다] 의열단의 역사를 사실대로 전파하기 위해 쓴 '소설 의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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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독립운동기념관(왼쪽)과 의열기념관의 게시물은 모두 의열단이 "중국인 반씨 집"에서 창립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 정만진


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모의 집에 모인 독립지사들은 밤을 새워가면서 독립 비밀결사의 결성을 숙의한 결과, 이튿날 아침인 11월 10일 후일 일제에게 위협과 공포의 대상이 된 의열단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 국사편찬위원회 누리집 '한민족 독립운동사'

1919년 11월 10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파호문(巴虎門) 밖 반(潘)씨 성을 가진 중국인 집에서, 김원봉 주도 하에 '일제 침략을 물리치고 정의를 되찾기 위해 맹렬하게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였다. - 밀양 독립운동기념관 게시물 '의열단과 밀양'

의열단이 창립된 곳인 중국인 반씨의 집은 길림성 파호문 밖에 있었으며, '화성여관(華盛旅館)'이라는 옥호(屋號)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밀양 의열기념관 게시물 '반씨 주택'
 


인용문들은 모두 의열단이 '중국인 반씨 집'에서 창립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산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간행 <한국독립운동사연구>(2012)의 한 논문도 '의열단은 1919년 11월 10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씨 집에서 창단되었다'라고 기술했다. 


이 논문은 근거로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26쪽'을 들었다. 의열단 창립 장소가 '중국인 반씨 집'으로 일반화된 것이 김원봉 구술·박태원 기록의 <약산과 의열단>에 따른 결과임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중국인 반씨 집' 창단은 김원봉의 구술

김원봉은 <약산과 의열단>을 통해 '11월 9일 밤,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모의 집에 동지들과 모여서 의열단을 결성했다'라고 증언했다. 의열단 창립 장소가 '중국인 반씨 집'이라는 김원봉의 증언은 진실인가?

참고로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가 펴낸 <광주 학생독립운동사>(1996)와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동지회가 낸 <대구사범 학생독립운동>(1993)을 살펴본다.

<광주 학생독립운동사> 99쪽에는 '김안진의 집에서 (1929년 11월) 12일 오전 9시 반을 기하여 행동 단계에 돌입할 것'을 결정했고, '박기석의 집에서 (격문) 약 1,000장을 인쇄했다'라는 기술이 실려 있다.

김안진의 집과 박기석의 집에서 시위 준비를 했다는 것은 실제로는 그들 부모의 집에서 2차 궐기를 도모했다는 뜻이다. 책이 '김안진 부모의 집'과 '박기석 부모의 집'이 아니라 '김안진의 집'과 '박기석의 집'으로 표현한 것은 집의 소유자가 아니라 행동의 주체가 핵심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집 소유자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핵심

<대구사범 학생독립운동>의 75쪽과 77쪽도 마찬가지 인식을 보여준다. 책은 대구사범학교 문예반과 다혁당(茶革黨)이 '대구시 봉산정 127번지 한삼경씨 집인 이태길의 하숙방'과 대구시 봉산정 242번지 이용남씨의 집인 류흥수, 이주호의 하숙방'에서 결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주 학생독립운동사>처럼 '이태길의 집에서'와 '류흥수, 이주호의 집에서'라고 하지 않은 것은 장소가 그들 부모의 집이 아니라 하숙방이었기 때문이다.

집의 소유자가 누구인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줄곧 의열단이 '중국인 반씨 집'에서 창단되었다고 기록해 왔고, 대체로 그렇게 알고 있다. 

화성여관의 중국인 소유자는 의열단 창단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 중국인의 성씨를 여러 독립운동 기념관에 게시하고, 각종 국사 서적과 논문에 기록하고, 또 알아야 하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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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 창립 장소를 정확하게 설명해준 김영범의 저서 <윤세주>  ⓒ 정만진


의열단 결성지는 '중국인 반씨 집'이 아니라 '이종암의 전셋집'이다. 김영범은 최근 연구 결과를 충실히 반영한 <윤세주>(2013)의 77쪽에 정확한 설명을 펼쳤다.

김영범에 따르면, '10여 명 청년들은 길림성 파호문 밖 반씨 집인 화성여관을 이종암이 내놓은 돈으로 전세 내어 합숙하면서 폭탄 제조법 및 사용법을 익혔다. 그리고는 11월 9일 밤에 다들 모여앉아 조직 결성과 활동 방침에 관해 밤새워 논의했다.'

중국인 반씨는 길림성 파호문 밖 화성여관의 소유자일 뿐이다. 이종암이 그 집을 전세 얻었다.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김대지, 서상락, 신철휴, 김상윤, 한봉인, 곽재기, 강세우, 이성우 등 의열단 초기의 단장, 고문, 단원들이 화성여관에서 창단을 준비하고 결성식을 가진 것은 그곳이 이종암의 전셋집이었기 때문이다. 즉 의열단 창립지는 '중국인 반씨 집'이 아니라 '이종암의 전셋집'이다.

의열단 창립지는 '이종암의 전셋집'

대구은행 본점 출납계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던 이종암은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 22세이던 2018년 2월 은행에서 빼돌린 1만500원(현시세 약 10억원)을 가지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3,000원(약 3억원)을 의열단 창단 자금으로 김원봉에게 주고, 7,000원(약 7억 원)을 김원봉의 고향 동지이자 자신의 천도교 선배 구영필에게 주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목적의 사업을 펼치도록 했다. 반씨 집을 전세 얻는 데 든 500원(약 5천만 원)도 이종암이 부담했다.

기자는 <소설 의열단>을 펴내면서 의열단 결성 장소를 사실에 맞게 전파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이종암은 대구은행에서 가져간 1만500여 원 가운데 3,000원은 김원봉 등에게 주어 생활비와 여비로 썼고, 7,000원은 구영필에게 맡겨 삼광상회를 경영시켰다. 삼광상회에서 얻은 이익으로 의열단을 운영하려는 계획이었다. 나머지 돈 500여 원은 길림성 파호문 밖에 있는 중국인 반모 씨의 화성여관을 세 얻는 데 쓰였다. 그때부터 화성여관은 이종암의 거처 겸 의열단 창립 준비 모임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10여 명의 청년들은 그 집에서 합숙하면서 폭탄 제조 및 사용법을 익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종암의 집에서는 의열단 창립식까지 열렸다.'

김원봉과 이종암은 한 집에서 동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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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의열단> 표지  ⓒ 정만진


이종암과 김원봉은 한 집에서 동거했다. '동거했다'는 표현은 <한민족 독립운동사>의 '김원봉, 이종암, 한봉근, 김상윤 등은 길림에서 동거하고 있었다'라는 설명에 따른 것이다.

이종암과 김원봉은 당시 만주 지역 핵심 독립운동단체인 군정사의 재무부장 황상규 등의 권유에 따라 신흥무관학교에도 함께 다녔다. 황상규는 김원봉의 고모부이자 중학교 때 스승이기도 했다.

이종암과 김원봉은 의열단 창단 직전 3개월 동안 상해에 머물면서 폭탄제조 및 사용법을 배웠다. 석 달 동안 두 사람은 임시정부 산하 구국모험단 단원들과 합숙을 했다. 

두 사람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한 사람은 그 무렵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었고 뒷날 의열단 고문이 되는 김대지였다. 김대지 역시 황상규와 마찬가지로 김원봉의 중학교 때 스승이었다. 

그만큼 황상규, 김대지, 김원봉, 이종암은 의열단의 창단과 활동을 이끈 핵심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에게 이종암, 황상규, 김대지의 이름은 생소하다. 의열단 창단 장소가 이종암의 집이라는 사실은 더욱 알지 못한다. 김원봉의 이름만, 그것도 근래에 와서 들었을 뿐이다. 김원봉이 출중한 독립운동가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외는 모두 잊혀지거나 왜곡되는 현실은 옳지 않다.   

그래서 <소설 의열단>을 쓰면서 88명의 독립지사들을 작품 속에 등장시켰다. 허구의 인물은 한 명도 만들지 않았다. 실존의 지사들이 무수하니 처음부터 가공의 인물을 창조할 이유가 없었다.

사건과 쟁점에 대해 433개의 각주와 미주를 붙였다. 황당한 이야기 수준을 넘어 역사저술을 방불하게 하는 독립운동 지식을 소설 속에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문장도 독립운동 전공 학자들의 저서와 논문에 나오는 표현을 대거 인용하였다. 사실(史實)을 독자들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욕심의 발로였다.   

<소설 의열단>의 주제는 무엇인가?

1919년 만세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1년여 앞둔 작년 봄부터 소설가의 사명에 대해 고민한 결과 <소설 광복회>와 <소설 의열단>을 펴내게 되었다. 

<소설 광복회>는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의 증손 박중훈 선생과 지휘장 우재룡 의사의 아들 우대현 선생께서 추천사를 써주셨다. 두 분은 '광복회가 소설로 재현되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매우 기뻐하셨다. 

<소설 의열단>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부단장 이종암 의사의 직계 후손은 만날 수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자는 <소설 의열단>의 마지막을 '일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그토록 죽이고 싶어했다. 일제는 김구에게 60만 원(현시세 약 200억 원), 김원봉에게 100만 원(약 320억 원)의 어마어마한 현상금까지 걸었다. 하지만 35년 긴 세월 동안 일제는 그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독립 이후 남과 북은 단 몇 년 만에 일본 제국주의의 꿈을 이루어주었다'라고 끝맺었다. 

이것이 주제인가? 작가로서, 그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우리의 미진한 일제 잔재 청산이 오늘도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정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