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김성숙 평전 22회] 기회를 살피고 있던 한인 애국청년들이 모여들었다
▲ 1937년, 김원봉은 혁명간부학교 졸업생을 규합하여 항일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 편성했다. 조선의용대는 뒷날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 위키백과
조선민족전선연맹은 내외정세 변화를 예리하게 지켜보다가 마침내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게 되었다. 조선의용대를 결성하는 인적 토대가 되는 의열단 간부학교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 등 100여 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의용대가 결성되기까지에는 '연맹'의 여러가지 노력과 역량이 전제되었다. 김원봉은 중ㆍ일전쟁 발발 1주년인 1938년 7월 7일 오랫동안 구상해온 조선의용대의 창설 계획안을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제출하였다. 중국군사위원회 위원장은 장제스이고, 부장은 정치부 진성(陳誠), 부부장은 저우언라이(朱恩來)였다. 저우언라이는 당시 팔로군 판사처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중국정부는 정치부에서 관할한다는 조건으로 조선의용대의 창설을 승인하였다.
'연맹' 측은 애초에 독자적인 무장부대로 조선의용군의 창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중국측은 침략 일본군에 맞서 싸우면서 아무리 동맹군이라 해도 자국에서 외국군대가 창군되는 것을 거북스럽게 생각하였던지 의용군 대신 의용대라는 이름을 쓰도록 하였다.
"군(軍)은 규모가 큰 것을 이르는데 이제 설립하려는 부대는 그렇게 큰 규모는 못되니 '대(隊)'로 할 것"(주석 4) 을 전제로 했다는 주장도 있다.
'연맹'은 조선의용대 창설을 준비하면서 광복단체연합회와 전위동맹측에 함께 참여할 것을 제안하였다. 광복단체연합회는 끝까지 합류를 거부하고 전위동맹은 의용대 가입의사를 밝혔다.
조선의용대 창설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여기저기에서 기회를 살피고 있던 한인 애국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갔던 청년들 중에는 조선의용대에 참여한 사람도 있었다.
1938년 10월 10일 오전 한커우(漢口) 중화기독청년회관에서 조선의용대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결성식에는 150여 명의 대원이 자리잡고, 각 지역에서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한국인과 중국의 군ㆍ정관계 요인들이 참석하였다. 조선의용대 창설에 앞서 김원봉ㆍ최창익ㆍ김성숙ㆍ유자명 등은 의용대의 규약과 강령을 마련하고, 재정ㆍ조직문제 등을 협의하였다.
▲ 약산 김원봉 장군 약산 김원봉 장군은 1920년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을 창설한 인물이다. 1930년대엔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운 뒤 애국지사를 직접 길러냈다. 이후엔 항일운동의 선봉을 맡았던 조선의용대를 창설, 총대장을 맡았다. 일본은 약산에게 지금 가치로 320억 원 이상의 현상금을 걸었다. ⓒ KBS 다큐영상 캡처
그 결과 총대장에는 김원봉, 제1구대 구대장은 박효삼, 제2구대 구대장은 이익성이 맡기로 하였다. 제1구대에는 민족혁명당 당원 등 42명, 제2구대는 전위동맹 중심의 74명으로 편성되었다.
조선의용대의 최고기관 지도위원회는 김성숙ㆍ이춘암ㆍ최창익ㆍ유자명과 군사위원회 정치부원 2인으로 편성되었다. 조선의용대의 주요 사항은 지도위원회에서 결정하였다.
대장으로 추대된 김원봉은 제1지대와 제2지대의 지대장에게 각각 군기를 수여하고, 조선의용대라는 한글글자 다섯 자와 Korean Volunteer라는 영문글자가 새겨진 배지를 대원들에게 나눠주었다.
김원봉은 대원들에게 "중국혁명이 완성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의 한국에 대한 압박과 착취가 날로 심하며, 한국민족이 해방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이 더욱 포악해졌음이 사실이다. 조선의용대의 기치를 높이 들고 중국 형제들과 굳게 손잡고 최후의 일각까지 분투하자."고 역설하였다.
대원들은 태극기와 군기를 앞세우고 기세도 당당하게 대장 김원봉 앞에 도열하였다.
"우리의 역량이 작다고 깔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조선 3천만 민중은 모두 우리의 역량이다."는 김원봉대장의 연설은 대원들의 가슴을 진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날 조선의용대 대원들이나 내빈 그리고 의열단원 특히 주역인 김원봉과 김성숙 등에게 무장부대의 창설은 생애를 두고 잊을 수 없는 감격적인 행사가 되었다. 비록 남의 나라 땅이지만 당당하게 무장한 군사력으로 조선의용대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중ㆍ일전쟁의 발발은 재중 한국독립운동가들에게 전략상의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었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한 연구자는 중일전쟁의 발발에 기인한 정세변화와 더불어 재중 한국독립운동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 전략상의 새로운 과제에 직면케 되었다고 분석하였다.
(1) 항일 전열을 공고히 하기 위한 민족통일전선의 완성
(2) 중국과의 명실상부한 항일연합전선의 결성
(3) 중국의 대일 전면 항전에 보조를 맞춘 참전과 그를 계기로 삼은 독립전쟁 결행 태세의 확립이다.(주석 5)
그동안 중국정부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둘러싸고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여러 가지 분야에서 경계했던 것이 사실이다. 때로는 지원을 하기도 했지만, 공개적인 지원이나 협력에는 지극히 인색하였다.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일정한 선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중ㆍ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더 이상 일본의 눈치를 살필 일이 없게 되었다. 오히려 한국 항일운동가들의 힘이 필요하게 되었다.
중국 국민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군사적 측면에서는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 점령지역 깊숙이 들어가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일에는 조선 청년만큼 적당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가급적 조선청년들을 많이 끌어들이려 하였는데 이를 위해서는 조선인들의 긍지를 드높일 수 있는 조선인 독자의 무력 건설이 대단히 필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조선인 부대의 창설은 조선 국내와 해외 각지에 있던 조선인들의 항일의지를 발동시키고 반대로 조선인이 동원되어 있던 일본군 내부를 분열시킬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장개석과 국민정부는 이 두 측면을 크게 고려하였던 것이다. (주석 6)
주석
4> 「김승곤지사증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46쪽, 1986.
5> 김영범, 「조선의용대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2, 469쪽, 독립기념관, 2001.
6> 고축동(顧祝同), 「조선의용대의 제3전구공작」, 정신문화연구원, 염인호, 앞의 책, 2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