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던 단체는 크게 세 집단이었다. 김구 주석이 이끌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태항산(太行山)과 옌안(延安)에서 활동했던 ‘조선의용군’,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했던 ‘항일빨치산’이 바로 그 조직들이었다.
이들 집단은 조금씩 차이는 있었으나 모두 일본군과 싸웠던 독립군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을 제외한 두 단체는 거의 조명되지 않았다. 광복 후에 북조선을 선택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중국 태항산·공산당의 성지 옌안 등
사진가 박하선, 조선의용군 행적 따라
흑백사진 90여 점과 함께 산문 실어
“늦게나마 재조명, 미안함 덜었다
이념 갈등은 모두 해방 이후의 일”
조직 면에서 탄탄했고, 항일투쟁의 최전방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희생이 컸던 조선의용군의 행적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신간 〈조선의용군의 눈물〉은 사진가 박하선이 조선의용군의 이름들과 그 행적을 찾아 중국 속 현장을 찾아 나선 결과물이다. 흑백 사진 90여 점과 현장에서 느낀 소회를 적은 산문이 함께 실려 있어 이해를 돕는다.
조선의용군의 흔적은 주로 중국 허베이성 태항산 자락과 중국 공산당의 성지인 옌안에 몰려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곳에 가면 그들이 기거했던 ‘야오동’이라는 토굴들이 부서진 채 남아 있다. 교육장으로 사용됐던 건물들의 일부도 살펴볼 수 있다.
조선학도병들의 탈영을 유도하기 위해 허베이성 운두저촌 건물벽에 조선의용대가 적어놓은 '왜놈의 상관 놈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요!'라는 한글 선전전 글귀.
박하선은 조선의용군들의 활동 흔적들을 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잡초 속에 묻혀 외롭게 남아 있는 무명용사들, 호가장 전투에서 숨진 4명의 조선의용군 희생자들, 십자령 전투에서 순국한 윤세주와 진광화, 지금도 중국에서 칭송받는 천재 음악가 정율성 등 조선의용군들은 이념과 상관 없이 모두 조선 독립을 위해 헌신한 조선의 자식이었다.
무한(武漢)에서 김원봉 등의 노력으로 탄생한 조선의용군은 일본군과 직접 싸우기 위해 1941년 충칭(重慶)과 뤄양(洛陽)을 거쳐 태항산으로 옮겨왔다. 그런 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라는 이름으로 대오를 정비하고 일본군에 대항했다.
이들은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투쟁의식을 고취시키고 일본군 부대를 상대로 심리전을 펼쳤는데, 그 가운데는 강제로 끌려온 조선 학도병들의 탈영을 유도해 의용군에 가담케 하는 일도 있었다.
황북평촌에 조성돼 있는 호가장 전투 순국 네 의사의 묘지.
지금도 마전 운두저촌(雲頭底村)에 가면 건물 담벼락 세 면에 선명한 우리말 글귀가 남아 있다. “왜놈의 상관놈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요!” “강제병 끌려온 동포들 팔노군이 있는 곧마당 조선의용군이 있으니 총을 하랄노 향하여 쏘시요!” 등이 바로 조선의용군이 남긴 선전전 글귀다.
태항산에서의 첫 전투는 산속 작은 마을 호가장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조선의용군 29명은 포위를 뚫기 위해 300명이 넘는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손일봉, 박철동, 최철호, 이정순 대원이 장렬하게 전사하고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군의 산파 역할을 했던 석정 윤세주가 일본군과 싸우다가 크게 다쳐 고향 밀양을 그리워하며 숨을 거둔 것은 십자령 전투에서였다.
책 속의 사진들은 왜 우리는 그들을 잊고 있었던가를 묻고 있다. 저자는 책 말미에 “늦게나마 이들에 대한 재조명을 이야기하면서 죄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게 된다. 이념의 차이로 인한 과오가 있다면 그건 모두 해방 이후의 일들이라 생각하자”라고 적고 있다. 박하선 사진과 산문/눈빛/174쪽/2만 2000원.
백태현 선임기자 hyu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