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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꿈에 그리던 해방이 왔건만 가족과 생이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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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29 17:28 조회11,75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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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30회] 해방의 소식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또 다른 고뇌가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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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아베 조선총리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임시정부가 갖은 노력 끝에 광복군을 조직하고 훈련시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일제가 항복하였다.

일왕은 항복이라는 말 대신에 종전이라고 표현했지만, 포츠담선언에서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일왕은 이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항복한 것이다.

가장 기뻐해야 할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항복 소식에 하나같이 기쁘지만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하였다. 국치 이래 35년 동안의 치열한 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쟁에서는 크게 기여하지 못하였음을 밝히면서 향후 대책에 부심하였다.
 
김성숙은 "경악과 황홀한 정신으로…미친 사람 모양으로 '한국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날뛰었다.…정신을 가다듬어 숙소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슴이 터지도록 기쁨과 슬픔이 북받쳐 오름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민족해방의 꿈이 실현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그러나 30여 년간 온갖 고난을 겪어가며 반일 독립투쟁에 헌신한 임정의 앞길, 전 민족이 함께 걸어 나가야 할 앞길은 먹구름 같은 외세에 가로막혀 캄캄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주석 1) 

꿈에 그리던 해방이 왔건만 들리는 소식은 암담한 뉴스뿐이었다.

전승국 미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라는 것이다. 1919년 3ㆍ1혁명의 산물로 태어나 27년 동안 일제와 싸우며 독립의 날을 기다렸는데, 막상 그날이 오니 '개인자격'의 귀국이었다. 당장 국내로 들어가는 교통편도 없었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임시정부의 당면 정책' 네 가지를 제시했다.

1. 임시정부는 최소기간 내에 입국할 것.
2. 미ㆍ소ㆍ영 등 우방과 제휴하고 연합국 헌장의 준수.
3. 국내에 건립될 정식 정권은 반드시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원칙으로. 
4.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자 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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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두군혜 가족사진. 김성숙의 중국가족과 동지들. 가운데 김성숙과 두군혜 부부가 서있고, 오른쪽이 박건웅이다.  운암 두군혜 가족사진. 김성숙의 중국가족과 동지들. 가운데 김성숙과 두군혜 부부가 서있고, 오른쪽이 박건웅이다.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김성숙에게 해방의 소식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또 다른 고뇌가 따랐다. 가족문제였다. 혁명의 동지, 반려자로서 1929년 결혼하여 슬하에 3명의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감(紺), 차남은 건(鍵), 삼남은 련(鍊)이다. 아내는 중국인임에도 "나는 조선의 딸이다"라고 선언할 만큼 한국을 사랑했고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전쟁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중국사회는 여전히 혼란상태이고 한국으로 가는 교통편이 있을 리 없었다. 생이별이 불가피했다. 김성숙의 아픔은 컸고 인간적 고뇌는 깊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중국에 망명하고, 고달픈 망명객에게 위안과 사랑을 안겨주고, 자식을 낳고 독립운동까지 나선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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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숙과 세아들 김성숙과 세아들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김성숙과 두군혜 그리고 세 아들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이산가족이 되고, 생이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산 후 두군혜가 한국독립운동가이며 두 사람과는 동지관계인 유자명에게 쓴 편지가 전한다.

1945년 11월 5일 규광(奎光) 동지는 임시정부와 함께 충칭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자식이 셋 있었습니다. 큰 아들 두감(杜紺)은 15살이고, 둘째 두건(杜鍵)은 12살이며, 셋째 두련(杜鍊)은 두 살 두 달이었습니다. 

12월 말에서 46년 1월 초 사이에, 두건이 복막염에 걸려 입원치료를 하였습니다.…당시 충칭은 백색테러가 창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몇몇 동지의 자식들과 저의 자식 셋을 데리고 상하이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당시 상하이에 아는 사람이 비록 있기는 하였지만, 안주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네 식구에 젖먹이 아기까지 있었고, 더구나 금방 큰 병을 앓고 나서 아직 원기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던 건(鍵)이가, 또다시 늑막염에 걸려 입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입원비용이 얼마나 비싼지 겨우겨우 돈을 돌려대며 유지하였습니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인 감(紺)과 련(鍊) 두 아이는 상하이 거리를 헤매며 먹을 것을 조금씩 사 먹고는, 밤이 되면 남몰래 사명병원(四明病原) 병실로 들어와 밤을 지새곤 하였습니다. (주석 2)


주석
1> 김성숙, 「오호! 임정 30년 만에 해산하다」, 89~90쪽.
2> 『유자명 자료집』1, 독립운동 편, 161~162쪽, 충주MBC,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