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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전쟁 말기 '중한문화협회' 등 한중 연대활동에 깊이 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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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28 17:25 조회11,7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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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29회] 전후처리 문제가 대두될 때 중국의 도움이 지대할 것으로 내다보고 세운 대책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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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김성숙 선생이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시던 상해 임시정부 모형사진. 운암 김성숙 선생이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시던 상해 임시정부 모형사진.  ⓒ 민성진
 

김성숙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동안 한ㆍ중 연대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처리 문제가 대두될 때 중국의 도움이 지대할 것으로 내다보고 세운 대책의 일환이었다.
 
1942년 10월 11일 충칭시방송국 건물에서 김구 주석을 비롯해 조소앙ㆍ김원봉 등 임시정부 요인과 순커(孫科) 행정원장 등 중국정부와 국민당의 유력인사 다수가 포함된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 창립대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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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김성숙 선생과 두군혜 여사 운암 김성숙 선생과 두군혜 여사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중한문화협회는 두 나라 정부와 당의 주요 인사들이 우호협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김성숙은 김규식ㆍ김원봉ㆍ유자명과 함께 한국 측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 단체는 양측 정부 차원의 사업과는 별도의 각종 행사를 주관하였다.

3ㆍ1독립기념강연회,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25주년 기념 강연회, 전쟁 후에 있어서의 한국독립문제 좌담회,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좌담회 등이다. 이같은 행사를 통해 양국 정부의 역할을 일깨웠다.
 
또한 1945년 3월 15일 충칭의 중앙문화운동위원회 문화회당에서 '한국구제총회(韓國救濟總會)'가 열렸다.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을 회장으로 하여 두군혜ㆍ손두환 등을 이사로, 김성숙은 유동열ㆍ김붕준과 함께 감사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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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군혜 여사 두군혜 여사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김성숙은 중한문화협회와 한국구제총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배경의 하나로 아내 두군혜의 역할을 들었다.

"(두군혜는) 등영초(鄧潁超)라고 주은래 마누라 하고도 굉장히 가깝고 서로 친해온 그렇게 되니까 이러저러 해서 곽말약하고 서로 친하게 되고, …그런 관계로 해서 차차 주은래하고 알게 돼서 동필무(董必武)를 알게 되고 그랬지요." (주석 8)
 
김성숙은 자신과 아내의 인연을 맺게해 준 등영초를 통해 그의 남편 주은래를 알게 되고, 다시 중국공산당의 핵심인 동필무까지 소개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정이지만, 해방 후 이승만 아닌 김구나 여운형이 집권하고, 김성숙이 정부 요직에 있었다면 중국공산당 정부의 주은래ㆍ동필무 등 핵심 인사들과 관계가 유지되고, 한반도의 운명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중한문화협회ㆍ한국구제총회 등을 매개로 한 한ㆍ중연대활동 과정에서는 광저우(광주) 중산대학 출신의 학력,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조선의용대 활동의 중심인물로서 중국정부 요로와 맺은 인간관계, 조선민족전선 및 조선의용대통신 간행을 매개로 쌓인 중국 측 인사들과의 지면, 사회과학과 국제정치에 정통한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교양 등이 그의 입장과 위상을 뒷받침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한ㆍ중연대활동 과정에서는 아내 두쥔훼이(두군혜)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주석 9)


앞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지만, 두군혜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크게 기여하였다. 1943년 1월 23일 충찡에서 한국애국부인회가 결성될 때 두군혜는 중앙집행위원 9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선임될 만큼 한국독립운동에 열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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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조선부녀동포들에게 호소하는 두군혜 선생의 글. (1945 .7. 11. 독립) 해외조선부녀동포들에게 호소하는 두군혜 선생의 글. (1945 .7. 11. 독립)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다음은 그가 쓴 「해외 조선부녀 동포들에게 혁명자 후원 사업을 하자」는 글이다.

먼저 여러분에게 알리고 싶은 말씀은 나는 조선의 딸입니다.

그러나 조선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가장 우수한 조선의 자녀들로 더불어 20년 동안이나 일관되게 환란을 같이 하고, 생사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여러 가지 중대하고 긴박한 일 가운데에서, 가장 긴박하게 준비하고 실행하여야 할 일이 혁명자를 후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애국부인회의 주최로서 각 부녀단체와 유력한 개인을 총망라하여 '부녀계혁명자후원회(婦女界革命者後援會)'를 조직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장합니다.

혁명자후원회를 조직하여 먼저 각지에 있는 조선동포들을 향하여 피난동포 구조의연금 모집운동을 대규모로 진행합시다.… 혁명자 후원에 관한 일은 결코 우리민족 내부에서만 할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전세계 양심있는 인류, 특히 중ㆍ소ㆍ미ㆍ영 등 동맹 각국의 인민들에게, 더욱이 동정심이 많은 부녀들을 향하여 "조선혁명자를 원조하여 달라"고 크게 소리쳐서 요구하여야 합니다.…
 
동정과 원조를 받는 유력한 방법으로 먼저 조선혁명자 후원, 전시 조선아동 보육, 난민 구제 등을 목적으로 하고, 동맹국 부녀들과 연합하여 자선 성질의 단체를 조직하고, 같이 활동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우선 우리 중경에 있는 조선부녀들은 중경에 있는 중국부녀들과 연합하여 중한부녀친목회(中韓婦女親睦會) 혹 중한부녀호조회(中韓婦女互助會) 같은 단체를 조직하고, 조선혁명자 후원에 관한 일을 하루바삐 시작하도록 노력하기 바랍니다. (주석 10)

주석
8> 이정식 대담, 「김성숙 회고록 : 한국현대사, 중도좌파의 비극적 종말」, 303쪽.
9> 한상도, 「중경임정시기 김성숙의 활동과 정치사상」, 『운암 김성숙의 생애와 사상』, 111쪽.
10> 『독립』, 1945년 7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