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김성숙 평전 27회] 이로써 임시정부는 명실상부한 좌우합작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1944년 4월 20일 제36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소집하였다. 정기회의였다. 4월 24일에 임시정부 국무위원선거가 실시되었다. 아무리 전시내각체제이지만 국무위원은 임시정부 관계자들의 선거로 뽑았다.
이때 김성숙은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시영·조성환·황학수·조완구·차리석·장건상·박찬익·조소앙·성주식·김붕준·유림·김원봉 등과 함께 당선되었다.
▲ 임정 국무위원 당선통지서 임정 국무위원 당선통지서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1923년 청년 승려의 신분으로 망명하여 간난신고를 겪으며 독립운동에 투신한 지 11년 만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 그의 나이 46살 때이다.
함께 국무위원에 선출된 인사들은 대부분이 임시정부계열이고, 그와 김원봉ㆍ박건웅ㆍ장건상 등이 조선민족해방동맹계열이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명실상부한 좌우합작 정부가 수립되었다.
▲ 임시정부 국무위원 명단 임시정부 국무위원 명단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 시기였다.
1943년 11월 27일 연합국 수뇌들의 카이로회담에서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독립이 선언되고, 1944년 6월에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데 이어 8월에는 파리를 해방하였다. 한민족의 운명이 갈리는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카이로회담과 관련한 김성숙의 소견이다.
카이로회담은 일본의 패망을 목전에 전망하면서 연합국의 대일(對日) 전투와 일본 패망 전후 처리에 관한 문제들을 토의하는 회담이므로 한국독립 문제를 진정할 수 있는 중대회담이었다.
그러므로 임시정부는 여러 차례 중국정부 고위층과 특히 장개석 총통을 상대하여 이 문제를 논의한 결과 장 총통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되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 선언문을 보면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한국의 독립이 아니고 소위 적당한 시기에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 카이로회담에 참여한 3개국 영수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을 위해 모인 3개국 영수들 (왼쪽부터 중국의 장제스,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 독립기념관
이 선언은 임정뿐 아니라 전체 한국독립운동자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타격을 주게 된 것이다. 이에 임정을 구성한 각 혁명 단체들은 분연히 일어나 카이로선언의 소위 〈적당한 시기에 독립 보장〉을 반대하고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즉각 독립을 주장하는 해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성명 활동은 당시에 이미 진행되고 있는 대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하고 다만 한국 민족의 의사를 표시하는 데 불과하였다.
임정에 집결된 한국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반일독립과 민주 자유를 위하여 악전고투한 나머지 이번 카이로회담을 천재일우의 기회로 인정하고 커다란 희망이 실현되리라고 기대했던 것인데 이 꿈이 무참히 깨어지게 되니 그들은 이 대세의 압력 아래서 다시 새로운 변화 있기를 기다리는 동시에 자기 반성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당시 카이로회담에 참가했던 중국 관원 측으로부터 흘러나온 소식에 의하면 장개석 총통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함에 반해서 처칠 영국 수상은 한국 민족은 자기들의 생활을 자기들이 관리할 능력이 없는 민족이므로 적당한 시기를 기다려서 독립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루즈벨트 미대통령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태도를 취했다고 전한다. (주석 5)
주석
5> 김성숙, 「오호! 임정 30년 만에 해산하다」, 『월간중앙』 1968년 8월호, 86~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