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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미군정에서 6개월 투옥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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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02 18:48 조회10,9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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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34회]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또 다른 외세에 의해 투옥당하는 기구한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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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의 사진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혁명가의 일생이 기구한 것은 동서와 고금이 다르지 않다.

김성숙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3ㆍ1혁명에 참가했다가 감옥생활을 하고, 대륙에서 긴 세월 일제와 싸우다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또 다른 외세에 의해 투옥당하는 기구한 운명이었다.

임시정부를 떠난 김성숙은 홀가분한 신분으로 남도순회 강연길에 나섰다. 구속된 사연을 들어보자.


그래 나는 그 이튿날부터 나서서 연설을 하고 돌아다녔어요. 적어도 내 입장이라도 민중 앞에 밝혀야겠다고, 우선 전라도지방으로 갔어요. 강연 때마다 손님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더군요. 내가 속에 있던 얘기 다 하고, 민주의원은 미군정 앞잡이라고 욕을 퍼부었지요. 임시정부는 이제 해체되었다고 했지요.


전주와 이리와 김제를 거쳐 정읍에 가서 연설을 시작하려 하는데 미국 군인놈들이 총을 꺼내 가지고 많이 몰려와 종이쪽지를 하나 줘요. 영어로 썼으니 내가 알 리가 있나요? 


그래 "이게 무슨 뜻이냐" 그랬더니, 한 아이가 나오더니 "지금 곧 여행을 하자는 겁니다"해요. "여행이 뭐냐, 아 데리고 가겠다는 거냐? 왜 데리고 가겠다는 거냐?" 하니까 하지의 명령이랍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승만이 하지한테 "저 사람 속히 잡아 가두어야 된다"고 했답니다. (주석 10)

김성숙은 혁명가적인 기질이 강한 편이다. 실제로 그는 혁명가였다. 조국해방투쟁과 사회개혁운동은 혁명적인 테제였다. 의열단이나 조선민족해방동맹, 의용대, 임시정부 등 그동안 그가 헤쳐온 길은 보통 사람들이 걷기 어려운 혁명의 과정이었다. 혁명가의 남도순회 강연은 투옥으로 막을 내린다.

그래 3월 30일 체포되어 전주에서 재판을 받았어요. 가관이지. "내가 뭣을 어떻게 했다는 것이냐?" 했더니 "미군정을 반대했다"는 겁니다. 미군정법 제2호에 보니까 "무릇 군정을 반대하는 자는 6개월 금고라는 거요. 그래 전주감옥에 6개월 있었소. 내 휴양 기간이었지. 

수십 년 고난으로 전쟁에 너무 시달려 심신이 말이 아니었는데 잘 쉬게 되었다 싶었어요. 아닌게 아니라 특별 대우를 해줍디다. 정원에 늘 나와 있게 하고 목욕도 자주 시켜주고 늘 와서 진찰해서 약 먹여주고 음식도 밖에서 좋은 것 들여다 주어 편안히 지냈어요." (주석 11)


조선총독부에 이어 미군정에서 다시 옥살이를 하는 참담한 심경일 터인데도 여유롭게 대처했던 것 같다. 풀려나게 된 과정을 들어보자.

내 만기가 되어 오던 때 좌우합작 운동이 전개되었어요. 미군정의 고문인 레오나르드 버취(Leonard Bertsch) 중위가 김규식 박사를 내세워 여운형과 손잡아 좌우합작을 꾀하기 시작할 때 아니었습니까?

이때 김 박사가 민주의원 부의장으로 의장대리를 맡고 있을 때인데 버취에게 나를 풀어주라고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개월 만기를 14일 앞두고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946년 9월 말입니다.

석방되어 나왔다니까 박헌영 일파가 나를 포섭하려고 이승엽의 집에다 불러 놓고 그 대접이 굉장했어요. 특별히 만든 술로 대접을 하고, 며칠 동안 거기서 잘 얻어 먹었어요. 참 잘해 주었어요. (주석 12)

주석
10> 『김성숙 면담록』, 136쪽.
11> 앞과 같음.
12> 앞과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