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18) 여운형의 죽음
해방 뒤 좌우합작 주도한 여운형
12차례나 우익 테러에 시달려
“정치적 반대자들이 목숨 노린다”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경고 내용
미군정, 사건 이틀 전 보고받고도
아무런 보호조치 취하지 않아
46년 7월엔 피살 직전 탈출해
미군정, 압수편지 통해 테러범 신원
알고도 범인 검거·수사 착수 않아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을 지내고, 1946년부터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여운형은 1947년 7월19일 낮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 테러범에 의해 피살됐다. 여운형의 장례식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자료
암살의 사전적 정의는 ‘몰래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의 죽음은 이런 사전적 정의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는 암살되었나, 아니면 공개적으로 살해되었나? 몽양이 피살되기 20일 전인 1947년 6월28일 주한미군사령관 존 리드 하지 장군이 이승만의 테러 음모를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하지는 서한에서 이승만 진영이 여러 건의 정치 암살을 기획하고 있으며 테러행위와 경제교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 “이승만 쪽이 테러 음모” 공개 비판
“귀하의 정치기관의 상층부에서 나온 줄로 짐작되는 보도에 의하면 귀하와 김구씨는 공위(미소공동위원회) 업무에 대한 항의 수단으로서 조속한 시기에 테러행위와 조선 경제교란을 책동한다 합니다. 고발자들은 이런 행동에는 기건(幾件·여러 건)의 정치 암살도 포함하기로 되었다 함을 중복 설명합니다. 이러한 성질의 공연한 행동은 조선 독립에 막대한 저해를 끼칠 터이므로 이러한 고발이 사실 아니기를 바랍니다. 조선의 애국심 전부가 건설적 방도에 발양되고, 아름다운 조선 대중에게 유혈 불행 재변을 의미하며 조선의 독립할 준비가 아직 안 되었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주는 케케묵은 방식을 통하여 발현되지 않기를 나는 과거에도 바랐고 또 계속하여 바랍니다.”
미군정사령관 하지가 이승만을 비판하는 공개서한(1947.6.28)의 내용과 이에 대한 이승만 쪽 반박 성명을 실은 <현대일보>(1947.7.2) 지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내용이 의미심장하다. 테러와 암살, 경제교란의 목표가 미소공위 파탄이라면 암살의 표적이 누가 될 것인지도 자명해진다. 그 표적은 미소공위 성사에 적극적이거나 주도적 역할을 할 사람, 또 미소공위 성사를 통해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면 가장 각광을 받을 사람일 수밖에 없다. 당시 우익 진영은 1947년 5월에 재개된 2차 미소공위를 파탄시키기 위해 반탁운동으로 힘을 모았고, 심지어 하지의 공개서한이 발표되기 닷새 전인 6월23일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 미소공위 회의를 마치고 이동하는 소련 대표단 차량에 돌을 던지고 공격하는 테러를 감행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소련 대표단은 6·23 테러 사건에 대해 미군에게 강력하게 항의했고, 재발 방지와 배후세력의 색출과 검거를 요구했는데 하지의 서한은 사후 면피용에 가깝지만 이 사건에 대한 소련 대표단의 항의를 무마하려는 생색내기의 성격도 일부 있다.
그런데 당시 미소공위 성사를 위해 노력하던 정치세력들 가운데 반탁 진영의 암살 표적이 될 만한 정치 지도자가 과연 누구였을까? 좌익 진영의 대표 격인 남로당 비서 박헌영은 1946년 9월 이래 미군정의 체포령이 떨어져 그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였고, 그의 활동 스타일은 그리 폭넓은 대중적 접촉면을 유지하지 않았다. 좌우합작운동 추진세력 가운데 김규식은 온건우파를 대표했지만 점잖은 선비형 정치인이었다. 국민들의 지지를 끌어모을 수 있는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으로 여운형 이외에 다른 지도자가 있었을까?
좌우합작운동에서 미군정 측 연락원 노릇을 했던 레너드 버치 중위가 여운형이 암살당하기 이틀 전인 1947년 7월17일 미군정 정치고문단 회람용으로 보고서 한 건을 제출했다. ‘김규식 및 기타 인물들과의 회합’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인데 상단에 하지 장군, 정보부장 존 웨컬링, 미소공위 미국 측 대표단장 앨버트 브라운, 하지의 정치고문 조지프 제이컵스 등이 모두 열람했다는 서명을 남기고 있다.
이 모임은 15일에 군정청 재무부 관리 에드워드 배의 집에서 열렸는데 참석자는 김규식, 여운형, 홍명희, 장자일, 정의경 등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했던 인사들과 김호, 김원용, 김용중 등 재미한인 대표들, 로버트 키니, 클래런스 윔스, 버치 등 정치고문단 소속의 미국인 관리들이었다. 참석자들의 면면을 볼 때 아마 곧 미국으로 돌아갈 조선사정사(朝鮮事情社) 사장 김용중(金龍中) 환송모임이 아니었나 싶다. 대화의 주된 화제는 역시 미소공위 전망이었고, 참석한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공위가 실패로 끝나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여운형은 최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으로부터 일군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으니 서울을 떠나 시골로 은거하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발언했다. 또 김용중은 이곳에 와서 지켜보니 점령이 장기간 계속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점령의 유일하고 가장 큰 실패가 법과 질서 유지와 관련한 것이라면서 그 책임을 경찰의 전반적 무능과 파당성에 돌렸다.
미소공위 때 소련 대표단과 대화를 하고 있는 여운형(맨 오른쪽). 여운형의 옆 한복 입은 이는 몽양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김규식, 가운데 양복 입은 이는 존 리드 하지 미군정사령관의 통역을 했던 이묘묵, 사진 맨 왼쪽은 민족변호사 허헌.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소장
여운형이 암살당하기 이틀 전에 미군정 고위관계자들이 열람한 레너드 버치 중위의 보고서. 보고서 2쪽에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암살 위험을 들어서 시골로 은거하라고 여운형에게 경고했다는 내용이 있다. 정용욱 교수 제공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여운형에게 암살 위험을 경고했다는 내용을 담은 미군정 버치 보고서 2쪽. 정용욱 교수 제공
‘신당동 김달호와 애국청년’의 테러
몽양은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했고, 미군정이 민주의원, 입법의원 등 한국인들의 대표기관을 추진할 때마다 그 이름을 올려놓기 위해 한껏 공을 들였던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 이래 그가 펼친 혁명활동과 다양한 정치·사회 활동으로 인해 당시 남한 정가에서 그 누구보다 대중적 신망이 두터운 노혁명가, 노정치가였다. 그런 그에게 서울과 수도권의 치안을 담당한 수도경찰청장이라는 자가 노골적으로 더는 당신을 보호할 수 없으니 시골로 물러날 것을 경고하는 것이 1947년 7월 남한의 정치적 분위기였다.
김용중이 지적했듯이 경찰이 친일세력의 온상이자 부정부패의 심장부이고, 그들이 극우 정치세력의 손과 발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나 미군정은 한국 사회의 거듭되는 경찰 개혁 요구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장택상의 경고는 몽양에게 닥친 위험을 진심으로 걱정해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더 이상의 정치활동을 중지하고 은퇴할 것을 요구하는 협박에 가까웠고, 그 무렵 몽양은 그런 협박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듣고 있었다. 미군정 최고 요직에 있던 지휘관들과 정치고문 역시 모두 이 보고서를 회람했지만 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 여운형을 보호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고 몽양이 그 성사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1947년 5월부터 몽양에 대한 테러 소문이 정가에 널리 유포되었고, 경찰은 물론 미군정 정보당국도 그러한 첩보를 수시로 확인했다. 사실 몽양은 서거하기까지 열두 차례나 테러 공격을 받았고, 일상적으로 테러 위협에 시달렸다. 미군정이 검열한 아래 편지와 그 취급 경과는 그에 대한 테러의 성격과 구조, 배후세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신당동에 거주하는 ‘김달호와 여섯 명의 애국청년’이 1946년 7월18일 극우지인 <대동신문> 사장 이종형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그런데 미군정은 이 편지를 압수하고 수취인에게 배달하지 않았다.
“우리는 당신과 이승만 박사를 섬기는 청년들입니다. 최근 여운형과 김규식의 행위를 증오하던 차에 여운형으로부터 그의 잘못을 인정하는 서약서를 받아냈고 그것을 여기에 동봉합니다. 귀하의 신문에 이 사죄 서약서를 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수일 내에 김규식으로부터 같은 서약서를 받아내어 귀하에게 보낼 것입니다. 거사가 완료되면 당신을 찾아뵙겠습니다.”
1946년 7월 서울 신당동의 김달호 등 우익 청년들이 여운형을 납치해 테러를 가한 뒤 이를 자랑스레 알리는 내용의 편지를 극우신문인 <대동신문>에 보냈다. 미군정은 이 편지를 검열 과정에서 압수하고도 범인들을 붙잡지 않았다. 김달호 편지 내용을 담은 미군정 보고서. 정용욱 교수 제공
이 테러 사건은 몽양이 서거하기 약 1년 전인 1946년 7월17일에 일어났는데, 몽양은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당시 신변의 위협 때문에 자택 대신 친지들의 집을 전전하던 몽양은 신당동 버치 중위 집에서 좌우합작회담을 마친 뒤 밤늦게 그의 집을 나섰다가 권총으로 위협하는 세 명의 청년들에게 납치되어 산속으로 끌려가 교살 일보 직전에 벼랑으로 몸을 날렸고, 그의 외침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에 의해 구조된 뒤 혼절하고 말았다. 김달호 일당이 편지에서 언급한 사과문은 몽양이 그들에게 납치되어 끌려가다 써준 것이었다. 해방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미군정 관리의 집에서 미군정 주선으로 진행된 회담에 참여했다가 돌아가던 노정객을 납치하여 그의 정계 은퇴를 강요하며 그를 살해하려는 시도가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또 범인들이 그러한 행위를 숨기고 감추기보다 다음날 버젓이 극우지에 그들의 테러행위를 공개적으로 선전하는 서한을 발송하는 조건에서 좌우합작운동은 진행되었다.
이 사건은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해방 후 결성된 좌익그룹의 연합단체) 의장단은 19일 하지 장군과 아처 러치 군정장관을 항의 방문하여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조병옥 경무부장, 최능진 수사과장, 장택상 경찰부장을 사직시킬 것을 요구했다. 민전 의장단은 이승만이 이끄는 독립촉성국민회를 테러단체로 지목하고 그 해산을 요청했다. 좌우합작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만큼 좌익 측 대표였던 여운형을 살해 직전까지 몰고 간 이 사건은 미군정을 당황하게 만들었으나 이 사건으로 여론의 지탄을 받던 경찰이나 미군정 모두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기보다는 무마하는 데 시종했다. 검열을 통해 확보한 위 서한은 이 사건의 범인들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으나 미군정은 이 서한을 압수하여 대동신문에 배달되는 것을 막았을 뿐 범인들을 검거하거나 조사하지 않았다. 대신 몽양에 대한 테러가 애국행위라고 찬양하던 이종형의 대동신문에 대한 정간 처분을 단행하여 당시 좌익 계열의 신문들에 대해 미군정이 내린 정간 처분과 균형을 맞추는 한편으로 이종형의 입을 막아서 테러의 배후와 실체가 폭로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 급급했다.
이종형은 여운형에게 닥친 12번의 테러 가운데 적어도 세 건 이상에 연루되었는데, 위 사례에 보듯이 직업적 테러리스트와 이종형, 그리고 극우 정치세력의 연계하에 테러가 자행되었고, 이승만은 미군정 정보보고서에 그 배후세력 또는 후원자로 빈번하게 이름을 올렸다. 또 경찰은 언제나 테러 사건의 실체에 대한 조사와 해명보다 그것을 비호하고 무마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1946년 4월 몽양 여운형의 회갑 때 부인과 찍은 기념사진.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소장
1919년 9월17일 대한민국 상해 임시의정원 6회 기념사진. 신익희(첫째줄 왼쪽 둘째)와 안창호(첫째줄 넷째), 김구(둘째줄 맨 오른쪽), 여운형(다섯째줄 맨 왼쪽) 등의 모습이 보인다. <백범기념관전시도록>,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몽양 “난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좌우합작운동은 극좌와 극우의 견제, 미군정의 무관심과 방기로 실패로 귀결하고 말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적 평가이다. 하지만 그 견제와 방기의 실체가 실은 나라의 독립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에 매진한 지도자들이 일상적인 테러의 위협 속에서 자기 목숨을 지킬 수 있는 수단과 방법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몽양은 1947년 7월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범이 쏜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운동의 동력이 소진되었고, 이후 2차 미소공위는 최종적으로 결렬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몽양은 서거 당일 오전에 김용중을 만나 한 통의 편지를 전했다. 몽양이 서거한 뒤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간 김용중은 두어 달 뒤 그가 발행하던 <한국의 소리>에 그로부터 받은 편지를 “한국 군사점령의 희생양”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그 편지 마지막 구절의 일부를 인용한다.
“1941년 1월6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세계는 네 가지 필수적인 인간의 자유 위에 기초해야 한다고 선포했소. (1) 언론의 자유, (2) 종교의 자유, (3)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4)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그것이오. 김 선생에게 하는 말이오만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일본의 항복으로 조선은 해방되었지만 미군정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아직도 나는 고통받고 있소이다.”
여운형이 암살당하기 하루 전날 <한국의 소리> 발행인 김용중에게 쓴 편지의 일부. 정용욱 교수 제공
미국에서 발행되는 <한국의 소리>에 실린 여운형의 편지. 여운형은 숨지기 하루 전날 <한국의 소리> 김용중에게 이 편지를 전달했다. 정용욱 교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