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김성숙 평전 31회] "임시정부를 민중의 기초 위에 세우도록 하자"
▲ 임시정부 환국 기념 촬영 사진.(1945년 11월 3일) 맨 앞줄 백범 김구 왼쪽이 김규식이다. ⓒ 백범기념사업회
임시정부 요인들은 11월 5일 장개석 정부가 마련해 준 비행기를 타고 5시간 만에 임시정부가 출범했던 상하이로 날라왔다. 그러나 미국이 보내주기로 한 비행기는 좀체로 나타나지 않았다.
임정 요인들은 상하이에 머문 동안 윤봉길 의사가 거사한 홍커우 공원을 비롯 박은식 선생 등 먼저 가신 선열들의 묘소를 참배하고, 귀국 후의 활동을 논의하였다. 상하이의 한 호텔에서 임시국무회의가 열렸다. 김성숙의 회고담이다.
(귀국을 위해 충칭을 떠나) 상해에서 체류하는 동안 모 호텔 회의실에서 김규식 부주석의 주제 하에 국무위원회를 개최하고, 입국문제와 입국 후 행동방침 문제를 토의하였다.…이 회의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행동방침 문제를 제출하고, 그 실행을 촉구하였다.
첫째, 임정은 비록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기로 되었으나, 미군정이 용인하는 한도 내에서 정치활동을 할 것인데, 국내에서 극좌ㆍ극우파의 대립 항쟁하는 사태에 임하여 임정은 어느 파에도 편향함이 없어 초연한 입장을 취하여 양파의 대립을 해소시키며 다같이 포섭하도록 노력할 것.
둘째, 입국 즉시 전국 각 정당ㆍ사회단체 대표자와 각 지방 반일민주인사를 소집하여, 비상국민대표대회를 가져 임정은 이 대회에서 30여 년간 지켜온 임정헌법과 국호와 연호를 채택하는 조건 하에서 임시의정원의 정원을 확대 개선하는 동시에, 명실상부한 한국 민주정부를 재조직할 것.
셋째, 미ㆍ소에 대해서는 평등한 원칙 하에서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 (주석 3)
▲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 사진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 기념사진. 앞줄 가운데가 김구 선생. ⓒ wiki commons
▲ 해방 환국 해방 직후, 여의도 비행장에 환국한 임정요인들과 장준하. ⓒ (출처:복음동지회 20주년 앨범 스캔)
임시정부 요인들은 상하이에 도착한 지 18일 만인 11월 23일에야 미군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나마 김구 주석 등 1진 15명만 1차로 환국하고, 김원봉ㆍ김성숙 등 2진은 일주일 후인 12월 1일 전북 옥구공항을 통해 환국하였다.
임정 요인들을 두 차례로 나누어 귀국 시킨 것은 먼저 입국한 이승만이 미군정 당국을 움직여 만든 농간이었다는 관측도 있다.
임정 요인들이 환국한 공항에는 환영객 하나 없었다. 국내에는 '임시정부 환영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으나 미군정이 이를 알리지 않은 것이다.
주석
3> 김성숙, 「오호! 임정 30년 만에 해산하다」, 91~92쪽.
4> 『의정원 문서』, 406~407쪽, 여기서는 한상도, 앞의 책, 125쪽,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