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 밀산에 자리잡은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
항일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라서
<4>일본이 두려워 한 봉오동 영웅 ‘홍범도 장군’
흑룡강 밀산에 자리잡은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
만주·연해주로 이동해 독립군 창설·독립운동가 양성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쓸쓸한 ‘죽음’
중국 흑룡강성 밀산시의 한 마을 산 중턱에 있는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총 한자루를 들고 일본군에 맞선 청년. 항일무장투쟁운동의 시발점이자 대한독립군 역사상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안긴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인물. 이 전투를 발판삼아 청산리대첩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독립운동가.
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홍범도 장군’이다. ‘호걸의 기풍이 느껴진다’고 할 정도로 일본군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비록 정식훈련을 받은 군인은 아니었지만 나라 잃은 슬픔에 혈혈단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홍범도 장군. 그는 타고난 투사의 기질로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독립운동 역사에 전설로 남고 있다. 하지만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머나먼 타국 땅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장군의 한 맺힌 삶은 과거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그의 역사적 평가와 활약도 제대로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에 일제강점기 당시 홍범도 장군이 활약했던 봉오동 일대와 밀산을 찾아 처절했던 그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 뒷면.
◇홍범도 장군을 기억하다…‘십리와 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
중국 흑룡강 밀산시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을 위해 온몸을 바쳐 희생한 홍범도 장군과 그외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십리와할일투쟁유적지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기념비는 밀산시의 한 마을 입구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청산리전투 이후 독립군들의 집결지가 된 곳이다. 1920년 12월 홍범도(대한독립군), 서일(북로군정서), 안무(대한독립회군)가 이끄는 독립군을 포함해 9개 단체 3천500여명의 독립군이 밀산에 모였다. 당시 서일은 이들 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해 대한독립군을 결성했다.
기념비가 세워진 일대는 우리 민족이 일본군을 피해 십리의 습지를 개간하고 옥토를 만들고 둔전병을 교육해 항일 투쟁의 전사를 만들어낸 곳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한독립군이 중국 밀산시 일대에서 독립군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사진은 중국 밀산 일대의 한 농촌지역.
2009년 밀산시 당국은 기념비 건립 장소 선정과 환경조성 작업을 진행해 십리와 뒷동산 소나무 숲 안에 기념비 건립 장소를 확정해 진입로와 기념비 둘레 조성사업을 완료했으며 현재도 누구나 둘러볼 수 있다. 기념비는 스촨성에서 가져온 백옥돌을 높이 2m, 너비 1m로 깎아 한글 비문과 중국어 비문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잡초들이 무성했지만 기념비에 서서 마을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마을을 둘러보면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군이 자리잡았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비문의 주요내용은 ‘독립군들은 밀산에 항일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해 500여 가구를 세워 황무지를 개척해 독립운동가 양성에 힘썼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봉오동 전투에서 대한독립군을 이끌었던 홍범도 장군.
◇만주 대한독립군 총사령관…‘봉오동 전투’ 대승 이끌다
홍범도(1868~1943)는 평안북도 자성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감삽으로 이사한 뒤 수렵과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일본이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빼앗으려 하자 이에 저항해 의병부대를 결성했다고 한다. 이에 삼수·갑산 지방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과 싸워 북청·후치령을 중심으로 갑산·삼수·혜싼·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크게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은 9시간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전멸시켰으며 이후 갑산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 점령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다. 다음 해에는 부하 박영신과 함북 경원의 일본의 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운동에 앞장섰다.
홍범도 장군이 당시 일본군과 맞설 때 소지했던 수류탄과 총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돼 400여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해 갑산·혜산·자성 등의 주둔한 일본군을 급습해 70여명의 적군을 사살했다.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과 남양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해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등을 공격해 오자 700여명의 독립군을 지휘해 사흘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는 등 대대적인 성과를 보였다. 특히 홍범도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는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10월에도 청산리 전투에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참가해 또다시 승리의 전투를 이끌었다.
그 뒤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해 대한독립군을 조직하고 부총재로 임명됐다. 이후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해 레닌 정부의 협저를 얻어 고려혁명군학교를 설립하는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 양성에 힘쓰는 등 그의 독립운동은 계속됐다.
카자흐스탄에 마련된 ‘홍범도 거리’ 표지판.
◇강제이주와 쓸쓸한 말년…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 몸바친 홍범도 장군은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1921년 6월 소련은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자유시참변을 겪은 뒤 이르쿠츠크로 이동했다. 이후 연해주에서 집단농장을 차려 농사를 짓는 등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동상.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됐다. 그는 이곳에서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 1943년 76세로 머나먼 이국땅에서 쓸쓸하게 사망했다.
홍범도의 묘.
이에 1982년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 ‘레닌기치’ 기자들과 한인들이 중심이 돼 크질오르다 중앙공동묘역으로 이장했으며 흉상과 3개의 기념비를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또 말년에 거주하던 그의 집은 크질오르다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됐다. 집 근처의 거리는 ‘홍범도 거리’로 지정돼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운동에 기여한 장군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또한 밀산에서 홍범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이끈 김좌진 장군의 일대를 다시한번 돌아본다.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