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신채호 선생 며느리 이덕남씨
단재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씨 뒤로 신채호(왼쪽) 선생과 남편 신수범씨 사진이 보인다. 강성만 선임기자
“우리나라는 참 나쁜 나라입니다. 이완용 송병준 같은 친일파 후손한테는 땅을 찾아주면서 독립운동가 후손한테는 지금까지 땅 한 뼘 찾아주지 않았어요.”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75)씨는 딸 신지원(49), 아들 신상원(48)씨와 함께 지난 6월 종교법인 선학원과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시부가 망명 전 살던 서울 종로구 삼청동 집터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다. 단재는 망국 넉 달 전인 1910년 4월 삼청동 집을 정리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집터는 일제 초 국유지가 됐다가 단재 순국 3년 뒤인 1939년 일본인한테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 뒤 몇 차례 주인이 바뀌어 지금은 종교재단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지난 6일 경기 하남시 자택에서 이씨를 만났다.
이씨는 단재 차남 수범(1921~1991)씨와 1967년 결혼했다. 장남(관일)은 어려서 죽고, 삼남(두범)은 1942년 15살에 영양실조로 세상을 떴으니 결혼 당시 남편이 단재의 유일한 후손이었다. 단재의 부인이자 이씨 시모인 박자혜(1895~1943) 선생은 막내 두범이 죽은 지 1년 만에 홀로 셋방에 살다 병고로 별세했다. 박 선생도 3·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의원의 동료 간호사들과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해 만세운동을 했다. 그 뒤 중국으로 떠나 베이징 연경대 의예과 재학 중 단재를 만났다.
이씨는 지난 4월 15년 중국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위암 선고를 받고 2004년 딸이 사업을 하는 중국으로 가 치료를 받았어요. 중국에서 병세가 호전됐는데 최근 병원에 가보니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요.”
그는 “아버님 집을 찾는 게 단재 기념사업의 완성”이라고 했다. “땅을 찾으면 장학재단을 만들고 아버님이 언론의 효시였으니 단재 언론상도 만들어야죠. 찢어지게 가난한 독립운동가 후손이 너무 많아요. 돈이 있으면 다 주고 싶어요.” 그가 소송을 제기한 토지는 모두 238평으로 시세가 “70억원은 넘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소장에 단재가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9일 치에 낸 광고 문안을 첨부했다. 내용은 이렇다. ‘본인소유 초가 6칸의 문권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분실하였기에 광고하니 쓸모없는 휴지로 처리하시오. 삼청동 2통 4호, 신채호 백.’ 그는 이 광고를 10여년 전 <대한매일신보> 영인본에서 직접 찾았다. “처음 광고를 보고 많이 흥분했죠. 아버님 집이라는 증거이니까요.”
소송엔 법제처장을 지낸 이석연 변호사가 도움을 주고 있단다. “아버님이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2009년에야 국적이 나왔어요. 당시 이 변호사가 법제처장으로 법리 해석 등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죠.” 일제 강점기에 호적 등재를 거부한 단재와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국적이 나오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가 일제 호적 등재자에게만 국적을 부여해서다. “아버님이 무국적이라 남편은 죽을 때까지 ‘아비 없는 사생아’로 살았죠.”
부친 칸이 비어 있는 단재 차남 수범씨의 호적. 단재는 일제 때 호적 등재를 거부해 정부 수립 뒤 국적을 받지 못했다. 2009년 법 개정으로 국적이 회복됐다. “남편은 생전 아비 없는 사생아로 살았죠.”(이덕남씨)
그는 소송은 상징적 의미도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법원은 법률 논리가 아니라 역사 논리로 판단해야 합니다. 일본놈이 한 짓을 지금 법률 논리로 판단해야 하나요. 왜놈이 식민통치하며 사람 못살게 괴롭혔어도 땅덩이는 못 떼어갔어요. 지금 소유권은 대한민국이 팔아먹은 겁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팔아먹었죠. 나라에서 보상해야 합니다.” 단재와 비슷하게 토지 소유권이 넘어간 독립운동가들이 많다고도 했다. “독립운동가들이 다 재산이 있었어요. 당시는 농경사회였어요. 논 몇마지기는 있어야 밥 먹고 살 게 아닙니까.”
남편 수범씨는 서울 한성상업학교를 나와 부친의 족적을 찾아 만주로 떠났다가 해방 2년 뒤인 1947년 고국 땅을 밟았다. “1945년 상하이를 떠나 육로로 2년 걸려 평양에 도착했다고 해요. 평양에서 3년 살다 1950년 12월 월남했죠. 아버님과 막역한 사이인 벽초 홍명희 선생이 북에 남을 것을 권했지만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뒷수습도 못 한 불효자’라며 월남하셨죠.”
무장 독립투쟁 노선을 견지한 단재는 외교론 위주의 이승만에게 임시정부 시절부터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승만의 1918년 위임 통치 청원을 두고는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고 강하게 성토했다. “김구 선생이 1948년 분단을 막기 위해 방북했을 때 남편을 찾아 그때 돈으로 80원을 주며 이승만 치하에선 신분을 감추고 살라고 하셨대요. 이승만 시절 남편은 부산으로 내려가 부두 하역장에서 일하고 넝마도 주우며 살았어요. 이승만 하야 뒤에야 은행원으로 취직했죠.”
단재는 박정희 집권 1년 뒤인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단재 전집 발간 때도 박정희 정권의 도움이 있었지만, 고초도 많았단다. “전집이 나온 뒤 아버님이 쓴 의열단 선언서 ‘조선혁명선언’이 그 시절 운동권 지하조직의 교과서가 되었어요. 이 때문에 우리 가족이 빨갱이 자식 취급을 받았죠. 그때 아버님 묘소를 참배하고 신씨 집성촌으로 내려오면 정말 동네가 싹 비어 있었어요. 물 한 잔 못 얻어먹었어요. 어린 아들딸에게 묘소 근처 백족산 계곡 물을 떠먹였죠.”
독립운동가 신채호 차남과 67년 결혼
2009년 무국적 시부 국적 회복 이어
지난 6월 시부 집터 돌려달라 소송
“아버님 집 찾는 게 기념사업 완성
승소하면 장학재단 언론상 만들 것
남편 죽는 날까지 아버지 그리워해”
남편을 두고는 “누구 손가락 아픈 것도 못 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가 남편과 이어진 것도 이런 성정 때문이었단다. “내가 농구선수로 서울시청 임시직원이었을 때였어요. (김해가 고향인 그는 농구 선수로 서울 정신여고를 졸업했다) 담석증 수술을 하려고 돈을 찾기 위해 제일은행에 갔다가 로비에서 까무러쳐 쓰러졌어요. 그때 제일은행 수탁부에서 일하던 남편이 저를 둘러업고 한의원까지 데려다주었어요. 나중에 보니 나도 모르게 치료비까지 냈더군요. 그 뒤 우연히 농구 행사에서 남편을 만나 제가 6개월 쫓아다녀 결혼했어요.”
결혼 뒤에는 서울 신설동에서 양장점을 4년 했고 경기 양평 용문산 주변 백토 광산을 인수해 직접 운영하기도 했단다. “내가 집에만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남편은 74년 은행에서 나와 광복회 총무부장을 내리 9년 했어요. 평생 월급을 집에 가져오지 않았어요. 아버님 일 때문에요. 어른(단재)의 위상이 올라가면 유족은 희생자가 됩니다.” 이런 일이 있었단다. “74년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아버님 사당을 조성하면서 우리 돈 470만원을 내 사당터를 샀어요. 서울 잠실 17평 아파트를 팔아 마련했죠. 관에서 하는 일이 그때나 지금이나 그래요. 문공부에서 사당 건립비 2700만원 예산을 책정했는데 그해 안 하면 사업비가 없어진다고 해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사당터 470평을 샀죠.”
남편은 부친 신채호 선생을 어떻게 기억했을까? “아버님을 두고 고집불통이다, 날카롭다고 하지만 남편에게는 정말 부드럽고 자애로운 아버지였어요. 남편은 8살 때 딱 한 달 아버님과 같이 중국에서 생활했죠. 그 한 달의 추억을 가지고 평생 살았어요. 죽는 날까지 아버지를 그리워했어요. 아버님이 뤼순감옥에서 순국했을 때 중국 동전 7개와 수첩 10권, 책 2권, 담배쌈지를 남겼어요. 남편이 이걸 계속 간직하다 한국전쟁 때 피난 오면서 평양 집 선반에 남겨놓고 가져오지 못했어요. 평생 그 죄의식을 가지고 사셨죠. 자신이 아버지를 못 지켰다고요.”
단재는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을 하다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며느리는 단재의 부정부주의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자유공동체 운동이죠. 그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어요. 정부가 국민에게 군림하지 않고 국민의 시녀가 되겠다는 것이죠.” 강성만 선임기자
단재는 결혼 2년 뒤인 1922년 아내에게 ‘아들이 조국의 풍습이나 말을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며 귀국하도록 했단다. 그 뒤 박자혜 선생은 서울에서 산파 일을 하며 홀로 아들을 키웠다. “남편은 굉장히 치밀한 사람이었죠. 완벽하게 살려고 했어요. 나는 덜렁대는 성격이라 많이 싸웠어요. 싸우면 내가 늘 이겼어요. 남편이 나한테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더군요.” 어떤 어머니이길래 그렇게 말했을까? “남편이 13살 때 아버지 이름이 알고 싶어 어머니에게 물었대요. 그러자 어머님이 찬물이 담긴 세숫대야와 부엌칼, 목침, 회초리로 쓸 싸릿대 한 줌을 가져다 놓고 남편을 목침 위에 세워 때렸다고 해요. 남편이 아프다고 하자 ‘그래도 알고 싶냐’고 물은 뒤 세숫대야와 부엌칼을 가리키며 ‘아버지 이름을 토하는 순간 혓바닥을 끊어버리겠다’고 하셨대요. 그리고 이름을 알려주셨다고요. 남편이 그러더군요. 어머님은 자신이 말한 것을 하고도 남을 분이라고요.”
‘불령선인’의 아내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아들을 키워야 하는 어머니의 고초가 말로는 다 못할 정도였단다. “일본 경찰이 어머님한테 산파 일을 맡긴 집은 꼭 찾아가 작살을 냈어요. 그러니 일이 없었죠. 남편 말로는 굶기를 밥 먹듯 했다고 해요. 배가 너무 고파 일본 사람들이 화신 백화점 뒷골목에 버린 과일 껍질을 주워 먹기도 했다고요. 어머님이 그 사실을 알면 자존심이 상해 남편을 많이 때렸대요. 남편이 교동초 1~2학년을 다니던 시절에는 일본 경찰이 하교 때 기다려 과자를 주고 책가방을 뒤졌다고 해요. 부모님이 독립운동가이니 편지라도 있을까 뒤진 거죠. 아무것도 못 찾으면 본전 생각이 났는지 또 두들겨 팼다고 해요. 그 뒤로 배가 하도 고프니 그 일본 경찰도 기다려졌다고 하더군요. 과자라도 먹을 수 있으니까요.”
단재 차남 수범씨가 은행원으로 일할 때 기록한 회계감사 노트.
그는 손주가 둘이다. 딸과 아들이 한명씩 아들을 뒀다. 검정고시로 고교를 졸업한 친손자(신정윤)는 올해 18살로 역사에 관심이 많단다. 20살인 외손자(남경민)는 현재 중국 런민대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일본 총리 아베가 망하는 건 시간문제다. “역사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셨어요. 아베는 호전적인 데다 역사인식이 전혀 없어요. 반성할 줄을 몰라요. 해방 뒤 일본은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어요. 야만인처럼 동아시아를 삼키고 패망했잖아요. 이걸 부끄러운 역사라고 가르치지 않으니 역사인식이 있을 수 없죠. 역사를 잊은 게 아니라 아예 지운 민족입니다.” 아베보다 ‘토착 왜구’가 더 큰 문제라고도 했다. ‘토착 왜구’는 친일파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이다. “토착 왜구들이 잘 하는 사람들을 음해하고 물고 뜯고 온갖 장난을 하잖아요. 거리낌 없이 아베를 찬양하고요. 100년 전보다 나아진 게 없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