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김성숙 평전 47회] 1961년 4월에 결성된 '백범시해진상규명위'는 곧 불어닥친 5ㆍ16쿠데타로 활동을 접어야 했다
▲ 백범장례식 후 운구장면 ⓒ NARA
김성숙은 4월혁명 후 정치활동만 한 것이 아니었다. 1949년 6월 이승만 세력에 의해 암살된 백범 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백범시해 진상규명위)에 참여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적폐 청산작업에도 발벗고 나섰다. 1961년 4월에 결성된 '백범시해진상규명위'는 곧 불어닥친 5ㆍ16쿠데타로 활동을 접어야 했다.
백범시해진상규명위는 위원장 김창숙, 부위원장은 김학규ㆍ이강훈. 상임지도위원은 조경한ㆍ김성숙ㆍ장건상ㆍ이강ㆍ정현섭ㆍ문일민ㆍ이광ㆍ윤길중ㆍ조시원ㆍ우문ㆍ안재환ㆍ유우석ㆍ유석현ㆍ장형ㆍ김승학ㆍ도인권ㆍ변영태ㆍ전진한ㆍ조각산ㆍ조윤제ㆍ이규갑ㆍ홍종인ㆍ박동엽ㆍ나재하ㆍ이은상ㆍ신태악ㆍ박석홍ㆍ정구영ㆍ신덕영ㆍ선우진 등이 맡았다.
위원장 김창숙 선생을 통해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 조재천 법무장관, 검찰총장 등에게 협력을 요청하여 쾌락을 받고 꾸준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5ㆍ16쿠데타로 좌절되고 말았다. (주석 1)
1961년 5월 16일 새벽 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 육군소장이 주동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4월혁명으로 태어난 장면 정권이 출범한 지 9개월 만이다. 다시 한번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역사가 퇴행하는 반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모처럼 싹트기 시작한 평화통일 운동과 혁신정치가 된서리를 맞게 되고, 모진 탄압에도 살아남아 기지개를 켜든 진보인사들이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 감옥으로 들어갔다. 김성숙도 5월 18일 체포되어 성동경찰서로 끌려갔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통일사회당의 간부들을 송두리째 잡아들였다. 정치위원인 서상일을 비롯하여, 정치위원 겸 국민대중동원위원장 김성숙(金星淑]), 정치위원 정화암, 정치위원장 이동화, 정치위원 겸 국회대책위원장 윤길중, 통일추진위원장 김기철, 재무위원장 구익균, 선전위원장 고정훈, 통제위원장 조헌식, 당무부위원장 이명하, 의회국장 황빈, 청년국장 한왕균 등이 구속되었다. 그리고는 통일사회당 자체를 불순조직으로 규정하고 당의 활동이 북한정권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로 몰아붙였다. (주석 2)
▲ 5·16 쿠데타 직후의 박정희(오른쪽 선글라스). ⓒ 위키백과
김성숙 등 혁신계 인사들에게 적용된 법률은 쿠데타 측이 사후에 제정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였다. 풀이하면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평생을 조국독립과 평화통일과 민주화를 위하여 일해 왔다고 자부했는데, 그것이 '반국가행위로 몰린 것이다. 그래서 더욱 억울하고 분통했다.
김성숙은 서상일ㆍ 정화암ㆍ이동화ㆍ윤길중ㆍ송남헌 등 혁신계 원로들과 함께 포승줄에 묶여 군사법정에 섰다. 공소장에 적힌 사건의 요지는 "동서냉전의 희생에서 해방되고 미소양국의 세력권에서 벗어나는 정치적 ㆍ군사적 완충지대 즉 영세중립화만이 통일독립을 가능케 한다"는 취지의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혐의였다.
이렇게 구속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된 김성숙은 1962년 2월 14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10개월 만에 풀려났다. 일제→미군정→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권력에 빠지지 않고 구속되어 징역살이를 한 한국인도 드물 것이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는 그가 유일하다. 이승만 때는 두 차례나 옥사를 겪었다.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독립운동가들인 김성숙을 비롯한 서상일ㆍ정화암 등은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치하 독립군을 토벌하러 다녔던 관동군 출신의 박정희에 의해 몸이 묶이고 수갑을 찬 채 법정에 섰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산 너머 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보다 한술 더 떠서 혹독한 탄압을 자행했다. (주석 3)
주석
1> 이강훈 『민족해방운동과 나』, 230쪽, 제3기획, 1994.
2> 『송남헌회고록 - 김규식과 함께 하는 길』, 우사연구회 엮음, 심지연 지음, 181쪽, 한울, 2000.
3> 목우, 앞의 책, 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