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김성숙 평전 46회] 4월혁명기에 혁신계를 이끌며 다시 한번 민족통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태웠다
▲ 4월 혁명 후 시민들의 시위대열 ⓒ 눈빛출판사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세평은 4월혁명 후 진보혁신계의 분열상에서 비롯되었다. 고질적인 파벌현상이 재발한 것이다.
혁신계의 분열상은 당장 김성숙에게도 피해로 닥쳤다. 사회대중당은 원내정당을 지향하면서 7ㆍ29 총선에 김성숙을 고양군에 공천하였다. 무려 11명이 입후보한 가운데 그는 이번에도 패배의 쓴 잔을 들어야 했다.
장건상ㆍ정화암 등 혁신계의 거물들이 낙선되었다. 고양군에서도 혁신계 인사들이 난립하면서 일제시대 언론인 출신 유광열이 당선되었다.
5대 선거에서 혁신진영은 무참하게 패배했다. 정원 233명의 민의원선거에서 사회대중당은 대구 을구의 서상일, 원성(原城)의 윤길중, 밀양 을구의 박권희, 남원 갑구의 박환생이 당선되었을 뿐이고, 한국사회당의 김성숙(金成淑)이 남제주에서 당선된 정도였다.
정원 58명의 참의원선거에서는 사회대중당의 이훈구가 충남에서, 한국사회당의 최달선이 경북에서, 혁신동지총연맹의 정상구가 경남에서 당선되었을 뿐이다.
민주당의 민의원당선자 175명, 참의원당선자 31명에 비하면 사회대중당은 민의원에서 44분의 1, 참의원에서 31분의 1밖에 차지하지 못하였으니, 선거결과를 분석해서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은 그럴수록 혁신 진영은 더욱 굳게 단합하여 새로운 각오로써 그 체제정비를 기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전과 하등 다름없는 군웅할거 심리에 도취되어 있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주석 3)
분열현상은 민주당도 다르지 않았다.
7ㆍ29 총선에서 압승한 민주당은 내각책임제의 실권자인 국무총리 자리를 놓고 신구파가 갈려 이전투구를 벌였다. 결국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분당되고 말았으니, 혁신계의 분열만 탓할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에 비해 혁신계는 훨씬 가혹한 탄압을 받았고, '이념형 정당'이라는 이유에서 비판이 따랐다.
혁신계는 자성과 논란 끝에 1961년 1월 20일 통일사회당으로 어느 정도 통합을 이루었다.
7ㆍ29총선의 패배로 혁신계는 이합집산을 거듭해 한동안 표류했지만 큰 줄기는 통일사회당(1961년 1월 20일)으로 다시 묶여졌다. 김성숙은 정치위원으로서 정화암ㆍ서상일ㆍ박기출 등 원로급 인사들과 나란히 통일사회당에 참여하였다.
이동화ㆍ송남헌ㆍ윤길중ㆍ고정훈 등 4ㆍ50대의 중견층이 실권을 장악한 통일사회당에서 김성숙은 혁신계의 원로로서 대접받았다. 그는 또한 혁신적인 제 정당ㆍ사회단체가 참여해 1961년 2월에 결성된 민자통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 의장단의 한사람으로서 1960년대 초반의 혁신계를 이끌었다. (주석 4)
4월혁명 후 재야 혁신세력의 최대 규모로 결성된 것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이다. 1960년 9월 30일 사회대중당ㆍ한국사회당ㆍ혁신동지총동맹ㆍ천도교ㆍ유교회ㆍ민주민족청년동맹ㆍ4월혁명학생연합회 등 혁신계 정당과 진보적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결성하였다.
민자통은 자주ㆍ평화ㆍ민주의 3대 원칙 아래 남북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구체적인 실현방안으로 △즉각적인 남북정치협상 △남북민족대표들에 의한 민족통일건국최고위원회 구성 △외세배격△통일협의를 위한 남북대표자회담 개최 △통일 후 오스트리아식 중립 또는 영세중립이나 다른 형태의 선택여부 결정 등의 중립화통일안을 내세웠다.
이와 함께 학생들의 남북학생회담 제의도 적극 지지하면서 5월 13일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1만여 명의 시민ㆍ학생들이 참석한 이날 대회는 △남북학생회담 전폭적지지 △남북정치협상 준비 등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김성숙은 62살의 나이로 민자통 의장단의 일원으로서 4월혁명기에 혁신계를 이끌었다. 이때 그는 다시 한번 민족통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태웠다.
주석
3> 정화암, 앞의 책, 332쪽.
4> 김재명, 앞의 책, 2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