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김성숙 평전 44회] 사회대중당 '창당선언문'과 '정강정책' 등의 입안에 능력을 발휘해
▲ 4·19 혁명.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이승만의 권력욕망 앞에 민주주의와 선거제도는 허상에 불과했다.
80이 넘은 고령인데도 그의 권력욕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아첨배들로 채워진 모든 국가기관은 사기업체로 전락되었다. 그 중심에 경찰이 자리잡았다. 박정희가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권력놀음을 했다면 이승만은 친일경찰에 뿌리를 둔 국립경찰을 사병화시켜 권력을 유지하였다. 이른바 경찰국가체제였다.
▲ 1960년 3월 15일 낮 12시 45분 "곡 민주주의 장송" 현수막을 들고 광주 금남로에서 전국 최초로 3.15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나선 장병준과 민주당 당원들. ⓒ 장병준기념사업회
1960년 3월의 정ㆍ부통령선거는 경찰의 주도하에 실시되었다. 공정한 선거로는 정권연장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유력한 라이벌 조봉암을 죽이고, 제1야당 후보 신익희가 사망하여 재집권은 따놓은 당상인데도, 후계자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관권과 금력을 총동원하고 경찰을 앞세워 3ㆍ15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더 이상 국민이 참지 않았다.
"책에서 배운 민주주의는 이런 것이 아니다"면서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면서 거리에 나섰다.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부정선거 다시하라!"는 구호가 "이승만 타도하자!"로 바뀌었다.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 국민들은 마침내 독재자 타도에 성공하였다. 4천년 역사에서 비폭력의 피지배 민중이 폭력적인 지배자를 타도한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시민혁명으로 이승만 12년 독재가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많은 학생ㆍ시민이 피를 흘렸다.
김성숙은 절망과 좌절 상태의 칩거 중에 4월혁명을 지켜보면서 한 가닥 희망을 되찾았다. 일제말기, 해방공간, 이승만 시대에 겪었던 민중의 무기력이 이제야 털고 일어나 민족정기와 사회정의가 회생한 것이다. 한없는 기쁨과 함께 고마움을 느꼈다.
4월혁명과 더불어 새롭게 나타난 가장 특별한 현상중의 하나는 혁신세력의 등장이었다. 혁신세력은 이승만 치하에서 불법화되고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형하는 등 가혹한 탄압으로 오랫동안 동면상태를 유지해오다가, 4월혁명의 물결을 타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혁신정당 중에서 4ㆍ19 직후에 정당간판을 내걸고 7ㆍ29총선에 입후보자를 낸 곳은 사회대중당ㆍ한국사회당ㆍ혁신연맹 등이었다. 혁신정당의 재건을 목표로 구진보당 간부와 민주혁신당 일부가 결성한 사회대중당은 1960년 6월 17일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서상일ㆍ윤길중 등을 간부로 선출하여 창당작업에 착수, 그해 11월 24일 출범했다.
김성숙은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어 사회대중당 창당에 참여하는 한편 '창당선언문'과 '정강정책' 등의 입안에 능력을 발휘하였다.
사회대중당의 '창당선언문'과 '정강정책'은 다음과 같다.
사회대중당 창당선언문
자유와 인권을 유린하고 온갖 부정과 비법을 자행하면서 국민대중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던 이승만 독재정권은 순진한 청소년 학도들의 영웅적인 피의 항쟁과 이에 호응한 애국적 국민대중의 과감한 투쟁에 의하여 마침내 전복되었다.
지금 우리의 민주혁명은 종결된 것이 아니고 시작된 것이다. 보수적 과도정권하에서 약간의 개혁이 수행되고는 있지만 이 혁명의 근본정신과 기본적 요구가 관철ㆍ달성되는 것은 금후의 일에 속한다.
그러므로 4월민주혁명의 완수를 저지ㆍ반전시키는 일체의 반동세력을 우리는 분쇄ㆍ구축하여야 하며 이 혁명의 진행을 억제하고 침체시킴으로써 협소한 당파적 이익만을 도모하려는 일체의 기회주의적 보수세력과도 우리는 과감히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투쟁의 당면목표는 민주주의적 정치적 제자유를 완전 쟁취하는 데 있다.
이승만 독재ㆍ폭압정권은 12년 간에 걸친 그의 악정기간 중 농민, 노동자, 근로인텔리, 중소상공업자 및 양심적 자본가 등 국민대중을 대변하고자 하는 혁신적 정치세력의 대두에 대하여 야만적, 살인적 탄압을 가하여 왔다. 그것은 혁명적 정치세력만이 광범한 근로민중의 기본적 제요구를 가장 솔직하고 가장 강렬하게 표백ㆍ대변할 수 있음을 이승만 일당의 우둔한 머리로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추악 파렴치한 이승만 일당은 우리 혁신진영에 대하여 '빨갛다'는 누명을 씌워 중상음해하고 혁신진영의 투사들을 날조구죄하여 고문ㆍ투옥ㆍ치사하는 등 온갖 간악한 죄과를 저질렀던 것이다.
위대한 4월혁명은 혁신진영에 대하여 존립ㆍ활동할 수 있는 기본적 입지를 마련하여 놓았다. 우리는 이 입지를 수호ㆍ확보하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여 투쟁할 것이다.
이승만의 반공정책이란 단지 '엉터리'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공산당을 '관제'로 조장하는 것이었다 함은 천하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당의 정강ㆍ정책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은 노선과 강력한 그 실천만이 공산주의를 그 근저에서 극복하는 가장 철저하고 진정한 반공노선임을 확신한다.
우리는 민족자주를 확립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민족자주의 확립은 국토통일의 성취와 자립경제의 건설을 전제조건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대내정책에 있어서는 자립경제의 달성을 주요 목표로 하고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통일성취를 중심적 목표로 하여 꾸준한 투쟁을 계속 전개할 것이다.
우리가 농민, 노동자, 근로인텔리, 중소상공업자 및 양심적 자본가 등 여러계층 및 사회적 집단을 대변한다고 할 때에 그것은 결코 계급주의적 입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현하 농민, 노동자, 근로인텔리, 중소상공업자 및 양심적인 자본가 등 사회의 제집단은 상호간 대립되는 이해관계를 조정 내지 초월하면서 보다 크고 보다 고차적인 이해관계에서 일치할 수 있는 광범한 근로국민대중을 형성할 수 있는 바 우리가 대표하고 대변하려고 하는 국민대중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장하는 민족자주는 민족독선 내지 민족지상주의와 엄격히 구별되는 것이다. 소위 민족지상주의라는 것은 독재주의자가 스스로의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견강부회적 또는 마술적으로 수시 악용하는 구호 내지 도구에 불과하다. 이것은 히틀러로부터 그 아류인 이승만 등에 이르는 일련의 역사적 실례가 증명하여 주는 바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를 엄중히 거부 배격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역사는 바야흐로 위대한 변혁기에 처하여 있으며 우리 민족사회도 또한 전환기를 거치고 있다. 우리 사회대중당은 - 광범한 국민대중의 적극적 참가와 지지를 얻어 - 민주혁명의 완수와 평화적 통일의 실현 및 민주적 복지 사회의 실현이라는 역사적 민족적 대과업을 옳게 담당ㆍ완수할 것을 이에 결의하고 맹세하고 선언하는 바이다. (주석 1)
주석
1> 『한국의 주요 정당ㆍ정책』, 381~382쪽, 시인사,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