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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중국에서 아들 셋이 찾아왔으나 이승만에 의해 추방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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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11 16:38 조회11,1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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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43회] 김성숙이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의 외교행각을 비판한 데 대한 보복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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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두군혜 가족사진. 김성숙의 중국가족과 동지들. 가운데 김성숙과 두군혜 부부가 서있고, 오른쪽이 박건웅이다.  운암 두군혜 가족사진. 김성숙의 중국가족과 동지들. 가운데 김성숙과 두군혜 부부가 서있고, 오른쪽이 박건웅이다.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감옥에서 환갑을 보낸 김성숙은 6개월여 만에 옥문을 나섰으나 몸과 맘이 말이 아니었다.

진보정치의 리더였던 조봉암은 처형당하고 함께 혁신정치의 길을 추구했던 많은 동지들이 수감되었다. 그나마 자신은 무혐의로 풀려날 수 있었지만, 진보당 동지들은 고초가 계속되고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목적이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제물(祭物)'이었기 때문이다.

의탁할 집 한 칸이 없어서 여전히 동가숙 서가식의 형편이었다. 독립운동가 출신 혁신계 동지들의 처지가 모두 엇비슷했다. 통분의 나날을 술로 달래었다. 세상의 인심이 메말라도 의기가 있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만나면 술을 사고 밥도 사주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독주를 마시게 되고 몸은 쇠약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피도 눈물도 없는 포악한 독재자였다.

오로지 자기의 권력연장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엮어 감옥으로 보냈다. 그 중에는 독립운동가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이승만을 독립운동가 김창숙은 '독부(獨夫)'라고 불렀다. 독재자보다 더 포악하고 구제받을 수 없는 가련한 인물이란 뜻이 담겼다. 


이 무렵 중국에 남아있던 세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으나 이승만 정권은 끝내 부자상봉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동안 중공(중화인민공화국)이 6ㆍ25 한국 전쟁에 참전하면서 한ㆍ중은 적대국가 사이가 되고 외교는 물론 모든 민간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러던 중에 아들 셋이서 한국으로 아버지를 찾아왔으나 정부는 그들을 인천 월미도에 있는 수용소에 가두었다가 중국으로 추방하고 말았다. 당국의 반인도주의적인 처사는 김성숙이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의 외교행각을 비판한 데 대한 보복으로 인식되었다.

계속되는 탄압으로 말미암아 김성숙은 실의와 좌절에 빠져 동지들과 만나서 밤을 새워 가며 폭주를 한 탓에 건강이 몹시 악화된다. (주석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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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숙과 세아들 김성숙과 세아들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독일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할 때 스스로 레지스탕스운동에 참여한 마르크 블로크(1886~1994)는 자식 6명을 둔 56살의 소르본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뤼시앵 페브라와 함께 아날학파를 일으켜 사회경제사가로 독보적 지위를 얻은 학자로서,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 프랑스 장교로 종군하였기 때문에 다시 입대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블로크는 조국이 독일에 점령당하자 자신의 나이나 가족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나 이루기 어려운 학문적 기득권을 내려놓고, 독일군과 싸우는 최전선의 레지스탕스 부대에 들어가 나치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싸우는 과정에서 예상외로 프랑스인들이 나치에 협력하고 있음을 지켜보았고, 블로크는 주력부대를 따라 영국으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블로크는 이들에게 쫓기면서 역사학자로서 프랑스정부 지도자들의 행적을 돌이켰다.

그리고 틈틈히 『이상한 패배』라는 제목으로 메모를 하였다. 그는 프랑스가 해방되기 1년 전인 1944년 6월 16일 프랑스 리옹의 벌판에서 나치  게슈타포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상한 패배』는 해방 뒤에 간행되었다. 

1940년 6월 14일 독일군이 파리에 진주하던 날 블로크는 프랑스의 서부지방 노르망디 사령부에서 다른 장병들과 함께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조국의 슬픈 운명의 원인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블로크는 어느 장교가 "역사가 우리를 배반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후 4년간 블로크의 생활은 그 장교의 생각을 철저히 부정하는 생활이었다. 블로크는 연합군과 함께 일단 영국으로 후퇴하지만 거기 머물러 있지 않고 나치스 치하의 프랑스로 돌아와 향리 리옹에서 반 나치스 지하 단체의 책임자로서 레지스탕스운동에 가담했다.

이 시기에 그는 두 권의 책을 썼는데, 하나는 『이상한 패배』이고, 또 하나는 『역사를 위한 변명』이다. 『이상한 패배』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은, 프랑스의 패인은 역사가 프랑스를 배반했기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의 지도층이 역사를 배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이것이 블로크의 굳은 신념이었다. (주석 9)


느닷없이 마르크 블로크를 찾은 것은 해방된 조국에서 핍박받는 김성숙과 그의 동지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조국이 자신들을 배반한 '이상한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데 이르러서이다.

'이상한 패배'였다. 그리고 '이상한 패배'는 계속되었다.

이 즈음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이 김성숙을 위로하기 위하여 시 한 편을 지어 바쳤다.

 비바람 한평생을 얻은 것 무엇이오.
 고난에 지치다 못해 머리에 서리를 이고
 이 저녁
 지하문 밖에 한 잘 술이로구려.

 세검정 물소리에 시를 흘려 보내시오.
 외롭다 말으시고 웃고 받아 마시구려
 동지들
 드리는 잔이라 맛이 별로 다르리다

 무엇이 그리워서 생이야 탐하리만
 제 땅엣 푸성귀라 그게 아니 좋으리까. (주석 10)

주석
8> 목우(木偶),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비극적 일생」, 『민족불교』창간호, 77쪽, 1989.
9> 노명식, 「역사에의 성실 ㅡ 자유와 평등」, 『문학과 지성』, 1980년 봄호, 16쪽.
10>앞과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