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김성숙 평전 41회] 김성숙은 그 배경은 알 수 없으나 진보당 본류와는 길을 달리하고, 민주혁신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 중산대학 시절 김규광(김성숙) 중산대학 시절 김규광(김성숙)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이승만정권 시대 진보ㆍ혁신계에 몸담은 독립운동가들은 일종의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보수야당에 참여한 사람들은 덜 했으나 진보ㆍ혁신쪽은 심한 탄압으로 목숨을 잃거나 극심한 곤경을 겪어야 했다.
김성숙을 비롯하여 박기출ㆍ서상일ㆍ신숙ㆍ신백우ㆍ이동화ㆍ정지필ㆍ조봉암 등은 1955년 12월 22일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진보당추진위)를 구성하고 취지문과 강령을 발표했다.
취지문에서 "관료적 특권정치, 자본가적 특권경제를 쇄신해 진정한 민주책임정치와 대중본위의 균형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신당을 발기할 것"을 밝혔다. 또한 강령에서는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배격하며 진정한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해 혁신정치를 실현할 것임" (주석 4) 을 다짐했다.
진보당추진위는 제3대 정ㆍ부통령 선거가 1956년 5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어서, 촉박한 시간 때문에 창당에 앞서 조봉암을 대통령 후보, 서상일을 부통령 후보로 선출하고 선거에 나섰다. 얼마 후 부통령후보 서상일이 사퇴하여 박기출로 교체하였다.
민주당에서는 대통령후보 신익희, 부통령 후보 장면이 선출되어 자유당의 이승만ㆍ이기붕과 3파전이 전개되었다. 투표일을 얼마 앞두고 신익희 후보의 급서로 야권후보 단일화 협상이 있었으나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 신익희 후보를 애도하는 인파(1956년5월) ⓒ 한국사진기자회
5ㆍ15선거는 관권 부정선거와 조봉암후보가 유세도 할 수 없는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은 216만 표를 얻어 이승만의 504만 표에 비해 유효투표의 30%를 획득하고 대구를 비롯 20개 이상의 선거구에서 이승만 후보를 앞질렀다.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졌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로 부정이 자행된 선거였다.
조봉암과 진보당추진위는 정당을 결성하기도 전에 대선에서 국민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이승만 측의 탄압이 가중되고 내부갈등이 심화되었다. 조봉암 측과 서상일 측의 대립이다. 두 사람은 대통령후보 선출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고, 결국 서상일이 부통령후보를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이승만 정권은 물론 보수야권에서도 조봉암의 인기와 진보세력의 신장에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1957년 10월 9일 자유당의 책임자이며 국회의장인 이기붕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조병옥. 그리고 무소속의 중진 장택상은 비밀리에 회동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전 공산주의자인 조봉암과 남북협상파인 박기출에 의해 영도되고 있는 진보당은 옳지 않으며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했다.
이들은 또한 진보당에 대해 어떤 조치를 강구해야 하며, 적어도 1958년 5월에 실시될 예정인 국회의원선거에 참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데 의견에 일치를 모았다는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주석 5)
이같은 '음모론'의 결과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진보당추진위는 창당을 앞두고 분열하였다. 조봉암세력과 서상일 세력의 분열이다.
진보당은 조봉암과 그 지지세력, 그리고 서상일과 그 지지세력으로 갈라져 시간이 흐를수록 골이 깊어졌다. 상호 불신이 싹트고 자라나 거대 혁신정당이 출현할 것 같이 호언장담했던 그 거대 조직은 가시권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로운 혁신 신당의 모습이 가시화되지 않은 가운데 진보당의 활동적인 핵심조직이 배제된 상태에서 작업이 진행되는 데 대해 진보당 핵심조직은 드디어 서상일과 그 세력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윤길중ㆍ이명하ㆍ김기철ㆍ조규희ㆍ신창균 등 진보당 핵심조직은 기존조직의 재수습으로 결당을 서둘렀다. 서상일의 거대 혁신신당운동이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나고 오히려 기존조직마저 분산시키고 악화시키는 결과밖에 초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주석 6)
김성숙은 서상일 측과 노선을 같이하였다. 그 배경은 알 수 없으나 진보당 본류와는 길을 달리하고, 민주혁신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진보당에서는 9월 민주혁신당 운동을 계속하겠다고 성명을 낸 서상일ㆍ김성숙ㆍ이동화ㆍ고정훈ㆍ최익환ㆍ최재방ㆍ안도명ㆍ신용순 등 8명을 제명 처분했다. 결국 서상일의 거대 혁신신당운동은 오히려 기존 조직마저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는 것으로 종말을 고했다. (주석 7)
주석
4> 정태영, 『한국사회민주주의정당사』, 458쪽, 세명서관, 1996.
5> 박기출, 『한국정치사』, 173~174쪽, 동경 민족통일연구소, 1977.
6> 정태영, 『조봉암과 진보당』, 250쪽, 한길사, 1991.
7> 앞의 책, 2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