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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발췌개헌에 이어 사사오입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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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08 16:34 조회11,11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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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40회] 이승만의 권력욕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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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재일대한청년단을 예방한 자리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민간 단체인 대한청년단의 총재를 맡았다. 이후 대한청년단은 민간인 살해와 불법구금을 진두지휘하다 국민방위군 사건에까지 연루된다.  ⓒ 대한뉴스
 

이승만의 권력욕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았기에 그래도 미국식 민주주의를 지킬 줄 기대했던 것이 허망한 꿈이었다.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서는 헌법이나 제도는 한낱 장식물로 취급할 뿐이었다.
 

불과 2년 전 부산에게 정치파동을 일으키면서 발췌개헌으로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종신 대통령을 꿈꾸면서 1954년 5월에 실시된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그 결과 자유당이 원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자유당은 대통령 중임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만들어 공고기간을 거쳐 11월 18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국회상정에 앞서 이승만 정권은 '뉴델리 밀담설'을 조작하여 보수 반공의 본산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용공으로 몰아가는 등 개헌안 통과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이 개헌 반대운동을 제압하고 개헌 비판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조작한 뉴델리 사건은, 전 민국당 선전부장 함상훈과 신익희 민국당 위원장이 1953년 6월 2일 당시 국회의장 자격으로 영국의 엘리자베스여왕 대관식에 참석한 후 귀국하는 길에 인도의 뉴델리 공항에서 6ㆍ25 때 납북된 조소앙과 밀담하고 비공산, 비자본주의 제3세력을 규합,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한반도를 중립국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이같은 사실을 날조하여 정적을 용공으로 몰아가면서 종신집권의 개헌을 감행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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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11월 29일 "사사오입 개헌" 당시 이철승 의원이 최순주 부의장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고 있다.   ⓒ 한국근현대사사전

개헌안은 11월 27일 국회에서 표결에 부친 결과, 재적 203명 중 가 135표, 부 60표, 기권7표로 개헌정족수인 136표에 1표가 미달되어 부결이 선포되었다. 이날 사회를 맡은 최순주 국회 부의장은 개헌안이 1표 차이로 부결되었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사사오입'의 수학 공식으로는 통과되었다고 억지를 부렸다.

이승만 정권의 '4사5입 개헌'은 절차상으로도 정족수에 미달한 위헌적인 개헌이었을 뿐만 아니라, 특정인의 종신집권을 보장한 개헌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헌정사상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자유당 소장파 의원들의 무더기 탈당이 뒤따랐고, 민국당은 무소속 의원들을 규합, 호헌동지회를 구성함으로써 민주당 창당의 계기가 되었다. 때를 맞아 혁신계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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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11월 29일 당시 "사사오입 개헌" 가결 동의안에 서명한 자유당 의원 20명이 기록된 국회 제19회 제91차 본회의 회의록. 27일 "부결 자축연"을 벌인 김영삼-현석호 의원의 이름이 "가결 동의안"에 올라있다.  ⓒ 김당

혁신정치운동에 참여했던 정화암의 증언이다.

일부에서는 혁신정당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소리가 높아갔다. 동년 2월에 전진한을 중심으로 한 노동당이 발족되었다. 그곳에는 혁신정치인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후 어려운 산고를 겪고 다시 이루어진 것이 1955년 9월 1일(음력 7월 보름)의 광릉회합이다. 여기에는 서상일, 장건상, 조봉암, 최익환, 서세충, 박용희, 정이형, 남상철, 양우조 등 장로(長老)들이 참석했고, 신도성, 윤길중ㆍ김기철ㆍ김경태ㆍ이명하, 김수선 등 젊은 사람들도 들어있어 모두 40여 명이 모였다.

이날의 회합에서는 현실정치의 진부한 보수성에 대한 비판과 신당운동의 필요성이 각자의 의견으로 제시되었고, 앞으로 구체적인 정치운동에 관하여 자주 회합을 열어 논의하기로 한 후 헤어졌다. (주석 2)


김성숙도 이 회합에 참석했다는 기록이다.

혁신 세력이 본격적인 창당 준비에 나선 때는 1955년 9월 1일이었다. 그들은 서울 근교인 경기도 광릉에서 회합을 갖고 (이른바 광릉회합) 여러 갈래의 혁신 세력이 대동단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이 광릉회합에는 조봉암과 서상일을 비롯한 혁신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참가했으며, 그 열매는 같은 해 11월 진보당추진위원회의 조직으로, 그리고 다음 해 5월 15일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제4대 부통령선거에서 진보당추진위원회가 공천한 조봉암이 2백 16만 여표를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김성숙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맡았으며 어느 정도 활발히 움직였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김성숙이 광릉회합에 참가하고 진보당추진위원회에도 관여한 것은 확실하다. 다만 진보당 창당 그 자체에 대해 열성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1955년 12월에 발표된 진보당추진위원회 12인의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으며 1956년 12월 진보당이 창당되었을 때도 참여하지 않았다. (주석 3)

주석
2> 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308쪽, 자유문고, 1982.
3> 『김성숙 대담록』, 144~1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