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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제2대 총선 출마 낙선, 부산에서 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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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06 18:01 조회11,1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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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38회] 일제, 미군정에 이어 3번째 옥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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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개원 모습. 당시 이승만은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를 시켰다.  ⓒ 자료사진
 
미군정 3년이 끝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미국의 단정정책에 재빨리 편승한 이승만이 권력을 장악했다.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지 23년 만에 해방된 나라의 최고통치자로 뽑혔다. 그의 집권은 정통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재앙이었다.

미군정과 정부수립 초기에 여운형과 김구가 암살되고, 일부는 월북했으며,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은 정치적인 낭인신세가 되었다. 독립운동가 중 정부에 참여하거나 제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하였으나 소수에 불과했다. 

정부수립과 함께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매국노ㆍ친일파 척결에 나섰으나 곧 이승만 정부의 경찰에 의해 반민특위가 습격당하고 해체되었다. 일제경찰 출신들이 대한민국 경찰로 변신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등에 업고 해치운 폭거였다. 이승만의 양해가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다시 친일파들의 세상이 되고, 이들이 작당하여 김구를 암살했다. 반민법 제정과 남북통일정부론을 편 의원들이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몰려 구속되었다.  

참담한 상황이었다. 목메이게 기대했던 해방, 꿈에도 그리던 독립정부가 세워졌는데 임시정부의 주석과 건준의 대표로 상징되는 두 지도자가 암살되고, 친일매국노들의 청산은 커녕 그들에 의해 반민특위가 짓밟혔다.

김성숙은 한동안 기력을 잃었다. 작은 힘이나마 20여 년 동안 해외를 떠돌며 독립운동에 바쳐왔는데, 되찾은 나라의 꼬락서니는 말이 아니었다. 망명시절에 온갖 시련과 간난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싸워왔는데, 지금 나라의 상황에는 절망일 뿐이었다.

중국에 두고 온 처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했다.
전후에 한국이나 중국이나 혼란하기는 마찬가지여서 편지 한통 전할 길도 막막했다. 유일한 낙이라면 옛 독립운동 동지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김규식ㆍ조소앙ㆍ김붕준ㆍ장건상ㆍ최동오 등과 어울려 시국을 살피고 회포를 풀었다.

제헌국회 의원의 임기는 2년이어서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했던 중도파ㆍ통일정부수립측 인사들이 모여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나가기로 뜻을 모았다.

국회에 들어가 통일문제와 점점 독재정치를 일삼는 이승만을 견제하자는 생각이었다. 중도파 민족주의자들 중에 김규식ㆍ조완구ㆍ엄항섭 등을 제외한 여러 사람이 각자 연고지를 택해 입후보하였다.

김성숙은 연고지인 경기도 고양군에서 민족자주연맹의 소속으로 출마하였다. 돈도 조직도 홍보기구도 없는 '나홀로' 선거였다. 긴 망명생활로 인해 국내 연고가 거의 끊어진 상태이고 사회적인 기반도 없었다.

고양군 선거구에는 유명ㆍ무명의 인사 13명이 입후보하여 혼잡을 이루었다. 낙선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소앙이 서울 성북구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된 것을 비롯, 장건상ㆍ김칠성ㆍ윤기섭ㆍ오하영ㆍ조봉암ㆍ조시원 등이 등원에 성공하였다.

민족자주연맹 소속 후보자들의 입후보 상황을 보면, 원세훈(서울 중구갑), 최동오(서울 중구을), 김붕준(서울 성동 갑), 박건웅(서울 용산을), 김성숙(경기 고양), 조일권(전북 전주), 박종운(경남 의령), 송일환(경남 울산갑), 최관수(경남 창원갑), 김성숙(金成淑 남제주) 10명이었다. 

이 가운데 당선된 인사는 원세훈 한 명뿐이었다. 원세훈은 남북평화통일 등의 슬로건이 아니라 '실업자가 없고 죄수가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라는 대중들이 현실에 와 닿는 슬로건을 내세워 강력한 상대자 대한국민당의 윤치영을 2천여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당시 윤치영은 김두한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또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중도파 인사는 안재홍, 장건상, 여운홍, 윤기섭, 오하영, 이병홍 등이었다. (주석 1)


5ㆍ30 선거가 실시된 지 한 달도 안 되어 6ㆍ25전쟁이 일어났다. 남북에 분단정부가 들어설 때부터 우려했던 일이 현실화된 것이다. 김성숙은 동족상쟁의 비극 앞에 통절한 아픔을 새기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피난을 갈래도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떠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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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서진 한강 철교와 인도교(1950. 9.).  ⓒ NARA 

그러던 어느 날 북한 당국의 독립운동 출신 '모시기 작전'의 일환으로 서울시 인민위원장이 된 남로당출신 이승엽이 사람을 보내 '협력'을 요청해 왔다.

김성숙은 전쟁을 도발한 그들에게 도저히 협력할 수가 없었다. 망명시절 한동안 공산주의사상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행태와 해방 후 환국하여 지켜 본 남로당세력의 행동을 보고, 더욱이 6ㆍ25전쟁을 도발한 그들에게 어떤 이유로도 협력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 피신했다가 1ㆍ4후퇴 때 간신히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하지만 피난지에서도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피난길을 막아놓고 적치하에서 부역했다는 혐의로 김성숙을 감금했다.

일제, 미군정에 이어 3번째 옥고였다. 다행히 무혐의가 밝혀져 풀려날 때까지 한 달 동안 부산형무소에 갇혀있었다.

6ㆍ25한국전쟁은 동족상쟁이라는 원초적인 비극과 함께 남한의 중도파ㆍ사회민주주의 세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주요 인사 대부분이 납북되거나 사망하고, 전후에는 이승만의 극우반공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면서 잔여 세력은 설 땅을 잃었다. 이승만은 전쟁을 계기로 더욱 독재체제를 강화시키고, 북쪽 또한 양상이 다르지 않았다.

주석
1> 윤민제, 『중도파의 민족운동과 분단국가』, 507쪽,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