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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근로인민당 참여, 여운형 암살로 당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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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04 18:20 조회10,89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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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36회] 김성숙은 잇따른 좌절과 실패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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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 창당식에서의 여운형 선생. 피살되기 2달 전의 모습이다.  ⓒ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가 미군정에 의해 해체되면서 1945년 11월 12일 조선인민당을 창당했다.

해방정국에서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정당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건준에서 인공으로 이어지는 정치조직이었다. 진보적인 인사들이 참여했다.

미ㆍ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남한에 단독정부 수립이 확실시되면서 여운형은 1947년 5월 24일 구인민당, 신민당, 근로대중당, 해방동맹 등과 통합하여 근로인민당(근민당)을 창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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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민당, 근로인민당등의 창당대회가 열렸던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참가자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조선인민당, 근로인민당등의 창당대회가 열렸던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참가자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호중

여운형은 천도교 강당에서 열린 창당대회 연설에서 4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첫째, 미ㆍ소 양국에 공정불편한 정책을 취하며, 둘째, 민족통일을 기초로 한 신흥국가로서 표현되어야 하며, 셋째, 봉건적 생산관계의 철저한 소탕과 개인적 창의를 허용하는 민주주의적 신경제체제를 수립하며, 넷째,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계승발양한다고 내세웠다. 


근민당은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백남운ㆍ이영ㆍ장건상이 선출되고 김성숙은 박건웅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근민당은 창당 두 달만에 여운형이 암살(1947. 7.19) 당하면서 곧 위기로 내몰렸다. 김성숙이 이정식 교수에게 전한 이 시기의 사연이다. 


1947년 5월에 창당했는데 당수 여운형이 두 달 뒤인 7월 19일에 암살된 데다가 탄압이 심해져서 대중조직을 갖출 여가가 없었어요. 그러나 여운형 씨가 원래 지지자들이 많아서 여운형 씨 계통의 대중조직이 있었다고 봐야지요. 즉 원래 조선인민당하던 사람들, 사회노동당 하던 사람들, 조선공산당을 하다가 떨어져 나온 사람들, 이 세력이 모두 근민당 세력이 되었다고 봐야지요.

지금까지도 국내에 이 근민당 세력이 꽤 많습니다. 무시할 수 없지요. 국내에서 혁신세력이라고 하는 세력은 사실상 이 세력이 대종입니다. 조봉암이 많은 표를 얻고, 활발히 혁신정치 활동을 했다는 것도 그 지지 기반이 되는 대중세력이 그 계통이지요. (주석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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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형 장례 행렬(1947. 8. 3.)  ⓒ 눈빛출판사


여운형이 암살된 후 당재건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이 시도되었으나 계파간의 갈등을 비롯 시국간의 차이 등으로 쉽게 봉합이 되지 않았다. 근민당은 백남운ㆍ정백 등이 월북하고, 정부수립 후 이승만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1949년 12월 김성숙과 장건상 등의 연서로써 당의 해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김성숙은 잇따른 좌절과 실패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혁명가들의 대체적인 모습 그대로이다. 혁명가는 시도하는 사람이다. 성패는 그 뒤의 문제에 속한다.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때마다 실패했다.
 늘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는 세련되게. - 사무엘 베게트.

김성숙은 김규식이 이끄는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했다. 중국 망명시절, 특히 충칭의 임시정부에서 가깝게 지내며 뜻을 함께했던 사이였다. 해방 후 김규식은 일관되게 좌우합작 노선을 추진해왔다. 김성숙이 추구하는 방향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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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 16일 서울 휘문중학교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발족을 선언한 여운형이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수록된 사진) 제공=김종민.  ⓒ 제주의소리  
여운형 선생과 김규식 박사가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해 좌우합작 운동을 벌일 때부터 저는 이 노선을 적극 지지했어요. 그런데 여 선생이 암살당하시자, 우리 근민당은 사실상 근민당 좌파와 근민당 우파로 나뉘어집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근민당 안의 사회노동당 계열이 근민당 좌파이고 나와 장건상을 중심한 세력이 근민당 우파였는데 이 근민당 좌파는 결국 이북으로 다 가버립니다.

나는 이북으로 가자는 것 끝까지 반대했어요. 나는 친소ㆍ반미도 안 되고 반소ㆍ친미도 안 된다는 민족 자주 노선에 서서 민족주의 운동을 하자는 것이었으니까요.

여운형 선생이 별세한 뒤 이 노선을 김규식 박사가 이끌고 나갔어요. 그래서 1947년 10월에 민족자주연맹 결성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12월 20일 마침내 결성식을 가졌습니다. 나도 여기에 적극 참여해 김 박사를 도왔지요. 나는 김 박사하고 의견이 일치했어요. 극좌ㆍ극우를 반대하고 민족주체성을 찾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민족자주연맹의 이념과 근로인민당의 이념이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혁신운동 혁신운동하지만 그 세력은 사실상 민족자주연맹 세력과 근로인민당 세력입니다.

이 세력이 합해서 처음에는 한민당과 싸우고 그 다음에는 이승만 정권과 싸우고 그 다음에는 장면 정권과 싸우고 그 다음에는 박정희 정권과 싸우고, 그 세력이 민족주의운동 세력입니다. (주석 18)

주석
17> 『김성숙 면담록』, 140쪽. 
18> 앞의 책, 142~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