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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쌀은 되박으로 사다먹은 처지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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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18 18:19 조회10,46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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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50회] "내가 자진 표창을 청구한다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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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형기록표의 김성숙 선생 수형기록표의 김성숙 선생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1964년 1월 2일 목요일
비교적 따스하고 맑음.

피우정 일을 논의하기 위해 조신(早晨)에 정릉으로 배도원 군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장건상 선생님 댁에 들려 신년인사를 하였다. 장 선생은 신년에 82 고령이지만 아직도 정정하시다. 장 선생은 박정권이 소위 독립유공자 표창에서 자기와 나를 배제한 것을 매우 분격하시며 이것은 반드시 밝혀야 할 일이라고 강조하신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되었다. 물론 한 개의 역사적 사실인 소위 독립운동자 표창 서열 중에서 우리들의 이름이 제외되었다는 것은 극히 불쾌하고 불공평한 일이지만 박정권이 우리들 혁신인사를 적대시하고 있는 현실에서 볼 때 그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해 버리는 것이 오히려 맘 편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주석 2)

1964년 1월 7일 화요일
비교적 따뜻하고 맑음.


직일 순옥(順玉) 모(母)와 정봉이가 쌀 한가마를 지고이고 나를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방 한구석에 쌀자루가 놓여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은 광수 부부가 보낸 것이다. 나는 작년 이래 소위 피우정 짓는 바람에 생활이 극도(로) 곤경에 빠져서 아침 저녁꺼리가 간 데 없이 된 적이 여러 번 있었고 근일에도 쌀을 되박으로 사다먹게 되던 참인지라 쌀 한가마가 방에 놓인 것을 보니 눈이 번쩍 뜨일 만치 풍족감을 가지게 된다.


우선 한 달 동안은 안심하고 밥을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할 때 내가 소위 나라 일을 한답시고 집안 살림을 돌아보지 못한 관계로 가난한 친척들까지 이리저리 한 폐를 끼치는 것을 생각할 때 스스로 미안한 맘을 금할 길이 없다. (주석 3)

1964년 1월 17일 금요일
따뜻하고 맑음.

함 목수는 일찍부터 일한다. 참 성실한 사람이다. 이처럼 성실한 사람이지만 그는 지금 극도의 생활고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일자리가 없어서 좋은 기술을 가지고도 밥을 굶을 지경이라니 이것은 분명히 이 사회제도가 잘못된 까닭이리라. 나는 함 목수를 볼 때마다 그 성실성에 감복된다.

하오에는 성동서 장석환 형사가 우대수 형사를 대동하고 내방하였다. 장 형사는 5ㆍ16 후 내가 성동서에 구속되었을 때 나를 직접 취조한 바 있고 그전부터 나를 감시해오든 형사인데 사람됨이 매우 얌전하고 맘씨도 선량하다. 우 형사가 이 동리를 담당하였다고 하며 우는 구익균 동지를 만나고저 한다. 또 상부에는 무슨 명령이 있는 모양이다.

저녁에는 배도원에게 편지를 쓰다.
종일 재가독서. (주석 4)

1964년 1월 24일
따뜻하고 맑음.

일기가 계속 온난하다. 금동(今冬)에는 한강이 얼어보지 못하고 지나가게 될 것 같다. 정부에서는 3ㆍ1절에 또 독립유공자 표창을 한다고 하는데 여러 동지들이 나도 이력서를 정부에 제출해서 표창을 받도록 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나의 목전 곤란한 생활정형은 그렇게라도 해서 생활비를 타먹게 되면 좀 나아질 것이로되 나 자신의 자존심과 인격적 긍지로서는 차라리 곤란을 받을지언정 그런 체면 없는 짓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정부에서 자진조사해서 표창한다면 그것은 역시 체면상 거부하기 곤란할 것이지만 내가 자진 표창을 청구한다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이 뜻은 처도 동감이다. 처가 고난을 무릅쓰고 살더라도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탄복했다. (주석 5)

주석
2> 앞의 책, 39쪽.
3> 앞의 책, 42쪽.
4> 앞의 책, 48쪽.
5> 앞의 책, 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