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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이고 보수야당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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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16 18:47 조회10,96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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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48회] 김성숙은 극단보다는 통합과 연대를 중시해 실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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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무식에서 연설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모습. 당시 최고회의가 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입주해 있었다.  ⓒ 대통령기록관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박정희 집단은 1962년 3월 16일 '정치활동정화법'(정정법)이란 것을 제정했다. 구정치인 및 군내 반대파의 손발을 묶기 위해 마련한 악법이었다.

이 조치로 무려 4,374명의 정치활동이 봉쇄되었다. 명단에 오른 사람은 자유당ㆍ민주당ㆍ신민당 및 진보적 혁신정당의 지도자, 전직 고위관리, 비판적 언론인, 부정축재자, 남북학생회담 관련 학생지도부 등이 망라되었다.

이들에게는 6년간 공직선거에 후보로 출마하거나 선거운동에 종사하거나, 정당활동을 하는 것 등 제반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규제기간을 6년으로 잡은 데에는 그 사이 치러질 두 차례의 선거를 통해 기성정치인들을 도태시키고 자신들을 부각시키려는 책략이었다. 김성숙을 비롯하여 혁신계의 동지들도 모두 정치활동이 봉쇄되었다. 정치적 금치산자 '산송장'을 만든 것이다.


침참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개인생활도, 나라 사정도 침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끼니가 없어 됫박질을 해야 될 정도로 너무나 비참한 생활을 했다." (주석 4)

박정희는 이른바 혁명공약의 '원대복귀' 약속을 파기하고 민정에 참여하고자 대통령제 개헌안을 만들어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하고(1962. 12), 민간인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가운데 민주공화당을 사전에 비밀리에 조직하였다. 군사정권은 4대의혹 사건으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기고, 중앙정보부를 조직하여 이를 통해 정보정치로 권력을 유지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박정희가 야당의 윤보선을 15만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박정희 후보의 남로당 행적을 둘러싸고 사상논쟁이 벌어졌지만 선거는 그의 당선으로 귀결되었다.

같은 해 11월 26일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 역시 야권의 분열로 공화당이 압승하였다. 이로써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하고 선거과정을 통해 '합법적'으로 정권을 취득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밀실에서 한일협상을 시작하고 굴욕적인 내용이 담긴 한일기본조약의 체결을 강행하였다. 학생ㆍ야당ㆍ문인ㆍ종교인들이 굴욕회담을 반대하고 시위에 나서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주도자들을 구속하는 등 탄압하면서 한일기본조약을 밀어 부쳤다.

김성숙은 비통한 마음을 금키 어려웠다. 일본군 장교출신이 정권을 잡고, 국익을 심각하게 해치는 굴욕회담으로 35년 식민 통치를 면죄시킨 처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치활동이 금지된 상태이고, 이를 제지할 힘이 없었다.

김성숙은 1964년 정치활동정화법에서 해제되자 윤보선이 '선명야당'의 가치를 들고 주도하는 보수야당 신한당에 참여하였다. 그가 보수야당으로 '변신'하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 5ㆍ16쿠데타 이후 보수야당의 실상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1963년 정치활동이 허용되면서 구민주당 계열 중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이지 않은 정치인들이 중심이 되어 5월에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후보로 내세웠다가 패배했으나 6대 국회에서 제1야당의 입지를 확보하고, 대일굴욕회담 반대투쟁 과정에서 제2야당인 민주당과 합당, 1965년 5월 제3공화국 출범 후 최초의 통합야당인 민중당을 출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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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등포고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 관련 신문 기사(경향신문, 1964. 3. 27) 1964년 3월 27일 900여 명의 영등포고 학생들은 중앙청 앞까지 진출하여 박정희 군사정권의 굴욕적 한일회담 추진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 경향신문사


정부가 대일굴욕회담을 강행하고 1965년 6월 공화당 단독으로 국회에서 비준되자 이에 반발하여 윤보선 중심의 민중당내 강경파가 의원직을 사퇴하고 1966년 2월 신한당을 창당했다.  

신한당은 윤보선을 총재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면서 전국 각지를 순회, 공화당 정권의 비리를 폭로ㆍ규탄하는 대중집회를 열었다. 신한당은 5ㆍ16 이후 가장 강경한 야당의 모습을 보였다.

김성숙은 이런 신한당에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 윤길중ㆍ박기출ㆍ임갑수ㆍ김기철ㆍ한왕균ㆍ이명하ㆍ정태영 등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신한당에 참여한 것이다.

김성숙을 비롯해 이들 혁신계를 떠나 보수야당이란 배를 바꿔 탄 배경은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1964년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의 체제가 출범할 무렵으로 군사정부의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을 때였다.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혁신정당의 활동에 제약이 심했다. 그래서 일부 혁신계 인사들은 보수야당이란 배를 잠정적으로 올라탐으로써 자체의 진용을 정비하고 시간을 갖는 한편으로, 보수ㆍ혁신의 합작을 통해 보수야당의 체질을 개선해 보다 효과적인 대정부 투쟁을 벌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판단을 내렸다는 설명이다. (주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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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유일한 승려출신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운암 김성숙 선생 우리나라 유일한 승려출신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운암 김성숙 선생  ⓒ 민성진

정확한 분석인 것 같다. 군사쿠데타의 광풍으로 혁신계가 산산조각이 나고, 흩어진 뗏목을 모아 조각배라도 조립할 수 있는 여건도 안 되었다. 그래서 택한 길이 보수정당에 기탁하면서 시간을 벌고 보수야당의 체질을 개선하려는 의도였다. 김성숙은 이제까지 극단보다는 통합과 연대를 중시하고 이를 실천해 왔다. 

주석
4> 앞의 책, 79쪽.
5> 김재명, 「김성숙 - 민족해방과 통일 위해 바친 자의 묘비명」, 『운암 김성숙의 생애와 사상』, 2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