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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의열단100주년] ⑨법정서도 日총독정치 거침없이 비판한 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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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22 14:05 조회8,30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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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뉴시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견되는 의열단의 창단 100주년을 맞아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도움으로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들을 매주 소개한다.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에도 잊혀져만 가는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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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의열단원 김한(1887~1938) 선생. 2019.09.22. (사진=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이번 사건은 총독정치가 자연히 만들어낸 것인즉, 이것만을 일본 사람이 알아준다면 나는 5년 징역은 고사하고 10년 징역이라도 달게 받겠다"(1923년 5월17일 김상옥 사건 제2회 공판)

1923년 1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제 경찰과 1대 400 전투를 벌인 김상옥 의사의 투탄 의거에 참여해 재판정에 서게 된 용감한 조선인이 남긴 말이다.

모진 옥살이로 핼쑥해진 이 조선인은 끝까지 일제에 당당했으며,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조선사람은 제령(制令)을 위반하지 아니하면 자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일제를 꾸짖기 시작했다.

특히 "교육으로나 산업으로나 어디를 보든지 총독정치는 조선 사람의 살기를 바라는 정치인가를 의심케 했다"며 분명한 논리로 일제 총독정치를 규탄했고 방청객 모두가 탄복했다.

서슬 퍼런 일제의 재판정에 서게 됐음에도 일제의 총독정치에 대한 거침없이 비판을 가할 만큼 신념과 의지가 굳건했던 이 사내는 의열단원 김한(1887~1938) 선생이다.

선생은 1887년 11월16일 서울 마포구 마포동 296에서 김동헌(金東憲)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4년 대한제국 탁지부 주사, 세무지사, 통신원주사를 지냈고 1905년 일본 도쿄 호세이 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다.

그러나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이에 1912년 만주로 망명하게 됐다. 이후 상해(上海), 천진(天津), 봉천(奉天) 등지에서 대한독립단원으로 반일 운동에 참가했다.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사법부장·법무국 비서국장이 됐고, 그해 7월에는 임시정부 산하 사료편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20년 2월 조선청년연합회 발기 및 집행위원이 됐으며, 5월 서울에서 원우관(元友觀) 등과 함께 최초의 공산주의 단체 가운데 하나인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에 열성을 다했다. 6월에는 조선청년회연합회 기성회 사교부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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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의열단원 김한(1887~1938) 선생의 수형사항(受刑事項)을 기록한 일제 문서. 아래 옥중 선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019.09.22. (사진=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1921년 1월 국내 최초의 청년 독립단체인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여했다. 5월에는 조선공산당 활동을 재개하면서 천도교 핵심인물인 최동희를 중심으로 일어난 천도교 혁신운동에도 관여했다.

1922년 1월 '조선공산당'의 합법 사상단체로 '무산자 동지회' 결성에 참여해 상무위원이 됐으며, 같은 해 2월 '김윤식 사회장(社會葬)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구한말 개화파 대신이었던 김윤식은 일본의 강제병합 뒤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3·1운동 당시 조선독립청원서를 내는 등 활동을 하면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박탈당했다.

김윤식의 이 같은 행보로 인해 당시 그의 장례를 둘러싸고 일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내부에서 의견 대립이 생겼다.

반대운동에 참여한 선생은 원우관 등과 함께 재동경신인동맹(在東京新人同盟) 명의로 '민중의 격(檄): 소위 김윤식 사회장이란 유령배(幽靈輩)의 참칭(僭稱) 사회장을 매장하라'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어 다음 날 조선일보에 '고(故) 김윤식 사회장 반대에 즈음하여 이 글을 일반민중에게 보낸다'라는 글을 기고했으나, 일제에 의해 압수당했다.

1922년 3월 사상단체 '무산자 동맹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차 정기총회에서 '사기(詐欺)공산당 사건' 관련자 제명을 요구했다가 거부되자 조선청년회연합회를 탈퇴했다.

사기공산당 사건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국내 간부가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으로부터 받은 공작금 일부를 사적으로 유용한 사건이다.

선생은 이 무렵 공산주의 단체 통일 운동에 참가해 그 결과로 결성된 '중립당'의 위원이 됐다. 1922년 9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집행위원으로 선임됐으며, 10월에는 조선인 출가(出稼) 노동자 조사회 결성에도 참여했다. 12월에는 경성양화 직공 파업을 지원했다.

그러다가 1923년 1월 의열단원인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의 국내책으로 검거돼 1심에서 징역 7년,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게 됐다. 당시 동아일보는 호외 기사에서 선생이 폭탄의 비밀수입과 계획, 수송, 실행방법을 맡아서 처리하기로 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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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일제가 작성한 인명록. 의열단원 김한(1887~1938) 선생을 고등수배(高等手配)자로 기록했다. 2019.09.22. (사진=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일제는 2심 판결문 주문에 선생을 징역 5년에 처한다고 명시하면서, 의열단장 김원봉과 그 단원 등이 경성부(서울)에 밀송해 사용할 폭탄을 집에 보관해 줄 것을 의뢰받고 이를 승낙했다고 기술했다.

이후 선생은 도쿄에서 일어난 박열 선생의 일왕(日王) 및 왕세자 처단 기도에도 연계된 것으로 조사되면서, 서대문형무소에서 도쿄 감옥으로 이감됐고 그곳에서 1927년 4월에 만기 출소했다.

박열 선생은 1922년 일본 왕세자의 결혼식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왕과 왕세자를 폭살하기 위해 김한 선생 등을 통해 중국 상하이에 있는 의열단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선생은 출소 후인 1928년 말 고려공산청년회 후계간부 결성에 참여했다. 1929년에는 조선공산당 재조직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 겸 혁명자 후원회 책임자가 됐다.

이어 6월에는 좌우합작 독립단체인 신간회 복대표위원회(複代表委員會)의 중앙 집행위원으로 선출, 국내 독립운동 총지휘자로 자리를 옮겼다.

1931년 12월 신간회 사건으로 일제의 검거 선풍이 불어닥치면서 러시아 연해주로 피신했으나, 이후 일본의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고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서울청년회 및 무산자동맹회 간부를 역임한 동지이자 친우인 원우관의 증언과 함께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한인(고려인) 희생자들'이라는 러시아 자료집을 통해 당시 스탈린 정권이 김한 선생을 비롯한 한인 지도자급 인사 3000여 명을 일본 간첩 등으로 몰아 숙청한 사실이 발견됐다.

정부는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선생에게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ksj87@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