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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71살로 서거, 뒤늦게 건국공로훈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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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22 14:02 조회11,06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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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54회] 71살의 짧지않은 생애이지만 고난과 형극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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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김성숙 선생 영정 운암 김성숙 선생 영정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고난의 생애였다.

19살에 출가한 이래 어느 한 때라도 편안한 적이 없었다. 남들처럼 승려생활로 시종하면 안전을 도모할 수도 있었고, 중국에 가서도 명문대학에 자리잡고 눌러앉을 수도 있었다. 중국의 엘리트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과 문학의 울타리 안에서 안일한 삶도 얼마든지 가능하였다.

해방 후에도 다르지 않았다. 미군정에 협력하고, 이승만 독재에 머리 숙이고, 박정희와 타협했으면, 그의 경력이나 능력으로 보아 얼마든지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이 혁신계 운동을 하고서도 군사정권에서 현직을 지낸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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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김성숙 선생 묘소 (국립 서울현충원) 운암 김성숙 선생 묘소 (국립 서울현충원)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무엇이 그로 하여금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고통의 길을 걷게 하였을까. '민족'이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승복을 벗어던지고, 민족의 평등이란 가치에서 한때 공산주의에 매료되었으며,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의열단에 참여하여 죽을 자리를 찾고, 중국혁명이 조국해방으로 이어진다는 신념에서 광동꼬뮨에 앞장섰다. 그에게는 삶의 모든 가치와 명제가 민족해방이었고, 해방 후에는 민족이 하나되는 통일정부 수립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길과는 달리 진행되었다. 좌우협상보다는 극우, 혁신보다는 보수가 지배하고, 독립운동가보다 친일세력이 세상의 주류가 되었다. 해서 '민족모순'의 창 끝에 찔리는 일이 거듭되었다. 아픔은 절망적이었다. 일제→미군정→이승만→박정희 권력이 예리한 창으로 가슴팎을 후볐으나 자신의 방패는 너무 허약했다. 그래서 만신창이-. 

1960년대 중반 신민당 지도위원에 위촉되어 다시 정당활동을 시작했으나 활동공간은 넓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기의 정당구도는 '일점반정당(一點半政?)체제'였다. 야당을 통치의 악세사리 정도로 취급하고 극심하게 탄압했다. 야당이 성장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박정희는 향토예비군 창설. 국민교육헌장 선포 등 국민을 통제하면서 독재정치를 일삼았다. 

김성숙의 건강상태는 날로 악화되었다. 기관지염이 심해졌으나 병원에 갈 처지가 못되었다. 입원비를 마련하기 어려웠다. 약국을 이용할 뿐이었지만 약값 마련도 쉽지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정부에서는 몇 차례 더 독립운동가의 서훈을 실시했으나 그는 여전히 배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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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숙 장례식장(조계사, 1969.4.12) 김성숙 장례식장(조계사, 1969.4.12)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운암 김성숙 선생은 1969년 4월 12일 오전 10시 피우정에서 영영 눈을 감았다. 궁핍함은 사후에도 곁을 떠나지 않아, 퇴원비가 없어 병원 시체실에 6시간이나 방치되는 등 수모를 겪어야 했다. 

71살의 짧지않은 생애이지만 고난과 형극의 삶이었다. 젊어서 승려였다는 인연으로 서울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향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13년이 지난 1982년 정부는 뒤늦게 의열단원 출신 김승곤(독립동지회장)의 추천으로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하고, 2004년에는 동작동 국립묘지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으로 유해가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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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숙 선생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장 훈장과 훈장증 김성숙 선생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장 훈장과 훈장증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운암의 생전에 따뜻한 관심을 갖고 1964년 집을 지었을 때는 '피우정'이란 당호를 지었던 노산 이은상은 선생의 영전에 구름(雲)과 바위(巖)라는 아호를 소재로 하는 조사를 지었다. 뒷 부분을 소개한다.

 하늘에 구름이 간다.
 나도 저 구름같이 간다.
 물속에 구름이 간다.
 나도 저 구름같이 간다.
 아무리 파도가 쳐도
 젖지 않고 간다.
 산 위에 바위가 섰다.
 나도 저 바위처럼 섰다.
 거리에 바위가 섰다.
 나도 저 바위처럼 섰다.
 꿈쩍 않고 섰다. (주석 2)


운암 선생은 서거하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유일한 명분은 민족국가의 독립과 민주체제의 확립과 행복된 사회의 건설이었다. 나는 이러한 대의명분하에서 일생을 바쳐왔고 아직도 이런 목적을 위해서 분투하고 있다."('일기', 1964년 1월 27일자)

운암 김성숙은 70평생을 독립운동ㆍ혁명ㆍ전쟁ㆍ감옥 등으로 이어지는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격랑의 시대를 살았다.

그는 19세에 가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잠시라도 안정된 생활을 하며 살아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숨이 멈추고 그의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고 눈을 감았다. 자유당 시절 신익희가 찾아와 장관자리를 얘기했을 때 "야! 이놈아 너나 해라. 네놈이나 똥물 속에 계속 놀아라"고 핀잔하던 말씀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는 노 보살님이 그 말씀을 전해준다. (주석 3)


운암 선생이 서거한 1년 후인 1970년 4월 12일 동지ㆍ후학들이 묘비를 세웠다. 묘비명은 노산 이은상이 지었다.

묘 비 명

- 조국 광복을 위해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하고, 정의와 대중복리를 위해 모든 사회악과 싸우며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이상과 지조로써 살고 간 이가 계셨으니 운암 김성숙선생이시다.

- 1898년 평북 철산(鐵山) 농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강개한 성격을 가졌더니 기미년에 옥고를 치룬 뒤 사회운동에 감담했다가 마침내 26세 때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 중국 중산대(中山大) 정치학과를 마치고 북경, 광동, 상해 등지에서 혁명단체의 기관지들을 편집했으며 광복운동의 일선에 나서서 혁명동지들을 규합, 조선민족해방운동을 조직하기도 하고 뒤에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여러 혁명 단체들을 임정으로 총 단결하여 국무위원이 되어 해방을 맞으니 48세였다.

- 귀국한 뒤에도 민족통일을 위해 사상분열을 막기에 애썼으며 최후에 이르기까지 20여년 정치인으로, 사상인으로 온갖 파란을 겪으면서도 부정과 불의에는 추호도 굽힘 없이 살다가 1969년 4월 12일 71세로 별세하자 모든 동지들이 울며 여기 장례 지냈다.

                                            1970년 4월 12일 노산 이은상(李殷相) 지음


주석
2> 『동아일보』, 1979년 4월 17일.
3> 목우, 앞의 책, 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