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수창 무후광복군 기념사업회 대표 ⓒ 김종훈
시작은 단출했다. 2010년 경찰에서 파면당한 뒤 야인이 되자 마음은 괴롭고 시간은 남았다. 그러자 한 지인이 "동네(수유리)에 있는 후손 없는 광복군(무후광복군)들을 위해 제사라도 지내보는 게 어떠냐"라고 권유했다. 그는 "이거라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몇 가지 제사 음식을 준비해 제사를 올렸다. 속으론 "'나라를 위해 희생된 큰 인물들을 잘 모시면 복이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라고 덧붙였다.
이런 가운데 그는 파면 당한 지 1년 반 만인 2012년 소송을 거쳐 다시 일선 경찰로 복직했다. 전 서울 강북경찰서장이자 현 무후광복군기념사업회 대표인 채수창씨의 이야기다.
앞서 그는 서울 강북경찰서장이던 2010년, 경찰 내부의 '성과주의'를 비판하며 조현오 당시 서울경찰청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경찰은 그를 '품위유지 의무 위반' 등의 이유로 파면했다.
채 대표는 2010년부터 명절이면 서울 북한산 자락에 자리한 17명의 후손 없는 광복군들을 위해 제사상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게 한 것이 벌써 10년, 지난해 4월에는 '무후광복군 기념사업회'를 창립했다. 자신은 기념사업회의 대표를 맡았다.
복직도 하고 안정적인 생활도 다시 찾은 상황에서, 광복군의 직계 후손도 아닌 그가 왜 기념사업회까지 만들며 후손 없는 광복군들을 모시려 했을까. 채 대표는 "그때는 독립운동을 못했으니 이제라도 하려고 했다"면서 2009년 경찰에서 파면 당했을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사실은 조현오 청장과의 일을 겪으면서 세상 일에 눈을 떴다. 그전에는 '나는 경찰대도 나오고, 경찰서장이고, 똑똑하다'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는데, 파면을 당한 뒤 '세상이 제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구나, 바른말을 해도 이런 고통을 겪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이 잘사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억울했다. 그일을 겪으며 우리 사회 문제에 대해 자연스레 각성한 이유다. 바닥까지 간 사람으로서 뭔가 제대로 살아보고 싶었고, '세상을 바로잡고 싶다'라는 결기가 생겼다."
조현오 총장과의 일을 겪으며 '각성'한 채 대표는 이후 시민들과 함께 무후광복군 선양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제약으로 무후광복군 한 분 한 분에 대한 조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며 미안해 했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을 앞둔 지난 23일 오후, <오마이뉴스>가 서울 수유리 무후광복군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채수창 대표를 만났다. 그는 현재 경찰을 나와 행정사 일을 병행하고 있었다.
▲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 한중 대표 기념촬영. 중앙에 김구 주석 왼편의 군복 입은 이가 총사령 지청천 장군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고름은 제거해야 한다"
이날 채 대표는 인터뷰에서 무후광복군뿐 아니라 최근 논란이 된 여러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는 "우리 역사는 고름을 안고 평생 살아왔다"라면서 "늦었지만 고름은 제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사들은 좌우 이념을 떠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웠다. 그러다 갑자기 해방을 맞이했다.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친일파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끌어안고 간 거다. 결과적으로 첫 출발부터 잘못됐다. 모든 곳에서 왜곡된 결과가 발생했다. 이제는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따지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리하는 게 맞다. 늦어져도, 복잡해도 고름은 제거하고 가야 한다. 70년 넘게 고름을 안고 살았다. 더 이상은 안 된다."
▲ 국내 진입작전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 도노번 장군을 만난 김구 선생 1945년 8월, 김구 선생은 중국 서안에서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장군과 함께 미국측 도노반 소장을 만나 광복군의 한반도 투입 문제를 논의했다. ⓒ wiki commons
채 대표는 그 시작점으로 "우리군의 뿌리부터 제대로 찾자"고 강조했다.
"군인들의 반발이야 당연히 예상되지만 우리군의 뿌리를 찾는 일은 국군의 날을 원래의 날로 바꾸는 거다. 우리군의 뿌리를 찾는 일인데, 언제까지 (친일의 역사를 갖고) 터벅거리며 걸을 것인가? 도려낼 부분은 도려내고 나아가야 한다. 9월 17일 광복군 창설일을 국군의날로 바꾸는 것이 첫걸음이다."
채 대표가 '바꿔야 한다'라고 강조한 지금의 국군의날은 1956년 이승만 정권이 정한 날로, 1950년 10월 1일 한국 전쟁 당시 동부전선에서 있던 육군 제3사단이 38선을 돌파한 날이다.
이 때문에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권과 독립유공단체를 중심으로 "민족상잔의 비극의 날을 어떻게 국군의날로 볼 수 있냐"면서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9월 17일로 만들자"라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군 내부의 강한 반발로 번번이 무산됐다.
"이영훈, 류석춘... 한국인 맞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일제의 항복이 다가왔다'라는 소식을 듣고 자력으로 국토를 수복하고자 같은 해 8월 11일 이범석 장군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을 편성했다. 그 결과 8월 18일 국내 진입을 시도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여전히 무장을 풀지 않은 상황. 소수의 광복군을 향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범석 장군과 광복군은 다시 중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처럼 광복군이 처음 걸음을 내디딘 곳이 서울 여의도다.
이날 채 대표는 지난 17일 광복군 기념식에서 박삼득 국가보훈처 처장이 "임시정부의 군대였던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토대가 되어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국군의날이 제자리를 찾는 것에 함께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채 대표는 "친일역사를 청산하는 건 역사의식을 확고히 하는 일"이라면서 "사회갈등이 심화될까봐 친일파 청산을 주저하는데, 후손들에게 책임을 묻자는 것이 아니다.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 같은 인물이 영웅으로 추앙받는 우리나라, 우리군의 현실을 바로 잡자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방법이다"라고 강조했다.
▲ 이낙연 국무총리가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제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이희훈
한편 서울 강북구 수유리 광복군 묘소에는 김성률, 김순근, 김운백, 김유신, 김찬원, 동방석, 문학준, 백정현, 안일용, 이도순, 이한기, 이해순, 전일묵, 정상섭, 조대균, 한 휘, 한이평 등 열일곱명의 지사들이 묘역 하나에 함께 잠들어 있다. 대부분이 중국에서 작전 활동 중 순국한 이들이다.
특히 1944년 열아홉에 광복군에 입대한 김순근 지사는 중국 톈진에서 동지들을 비밀리에 모으다 적발돼 해방을 앞둔 1945년 일제의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김 지사는 스무살에 불과했다. 이낙연 총리는 지난 8월 15일 대한민국 국무총리로는 처음으로 서울 수유리 무후광복군 묘역을 참배했다.
김종훈 기자(moviek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