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100주년 기념 한·중·일 국제 학술대회] "약산의 목적은 오직 조선독립"
▲ 1946년 개성에서 촬영된 약산 김원봉의 사진 ⓒ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왕석, 왕세덕, 김세량, 이충, 최림, 운봉, 진충, 진국빈, 암삼...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무장단체 의열단의 의백(단장) 약산 김원봉이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사용한 이름들이다.
조선족 출신인 최봉춘 항저우 사범대 교수는 2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의열단 100주년 기념 한·중·일 국제학술대회에 발표자로 참석해 위 이름들을 열거하며 "30년 동안 약산 김원봉을 연구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약산 김원봉은 절대 공산당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일제보다 공산당을 더 싫어했던 국민당 장제스와 김원봉의 관계를 설명했다.
"1926년 의열단 의백(단장)이던 약산 김원봉은 중국 군관학교인 (광저우) 황푸군관학교를 나왔다.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은 일제를 앞에 두고 갑자기 공산당을 타격했다. 김원봉은 살아남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약산 김원봉이 공산당이 아니라서 죽이지 않은 것이다. 1932년에 약산 김원봉은 난징으로 와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만들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국민당 장제스의 지원을 받아서 군관학교를 만든 거다."
최 교수는 "약산 김원봉은 1919년 11월 중국 지린에서 의열단을 만든 그 날부터 한국과 중국의 연대를 생각했다"면서 "약산의 판단에 강대국(일제)과 맞서려면 중국의 도움이 절실했고, 21살의 청년 김원봉은 이 도리를 알고 의열단을 만들어 단원들을 이끌고 대륙 깊은 곳에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독립운동을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30년 동안 약산 연구... 김원봉은 절대 공산주의자 아니다"
▲ 2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의열단 100주년 기념 한중일 국제 학술대회가 열렸다. ⓒ 김종훈
이날 최 교수는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단체인 의열단의 수장이었던 약산 김원봉이 모든 권한을 내려놓고 중국 군관학교 생도가 됐을 당시인 1926년의 모습을 공개했다.
최 교수는 "입학 당시부터 이미 김원봉은 대단한 사람이었다"면서 "그는 도량도 크고 머리도 좋았다. 무엇보다 잘생기고 인품이 남달랐다. 키(163cm)가 작긴 했지만 이미 그의 주변에는 조선사람뿐 아니라 일본사람, 서양사람, 중국인이 많았다. 그들이 나서서 의열단 의백 김원봉을 보호했다"고 강조했다. 그 이유에 대해 최 교수는 "약산이 그만큼 조선사람들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약산 김원봉의 주위에는 공산주의자도 있었고 민족주의자도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도 있었다. 중요한 건 김원봉 스스로 이데올로기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이미 (의열단이라는) 독특한 당이 있었고 당의 목적은 오직 하나, 조선민족의 독립이었다."
▲ 최봉춘 교수가 공개한 약산 김원봉의 황포군관학교 시절 모습. 현장에서 공개한 사진을 카메라에 담았다. ⓒ 최봉춘 제공
1898년 3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약산 김원봉은 백범 김구와 함께 우리 독립운동사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 인물이다. 1919년 11월 10일 중국 지린시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청년들과 함께 의열단을 창설한 뒤 자신은 수장이 됐다. 이후 1926년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를 거쳐 1932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해 이육사와 정율성 등 독립운동가를 길러냈다. 1938년에는 우리 국군의 뿌리가 되는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1939년 5월 중국 치장에서 백범과 함께 공동으로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발표해 해방된 조국이 걸어가야 할 자주독립국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 안에는 '일제의 통치를 전복해 조선민족의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며, 봉건세력 및 일체의 반혁명 세력을 숙청하고 '민주공화제'를 건립함을 분명히 했다. 또 친일재산 몰수와 노동시간 감소, 사회보험실시, 양성평등, 언론 및 신앙의 자유, 의무교육 등 지금 봐도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940년대 들어 약산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1942년에는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이 됐다. 194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명실상부한 군부의 최고 권위자가 됐다. 그러나 1945년 8월 해방 후 4개월이 지난 12월에야 개인 자격으로 고국에 복귀했다. 중국 망명 후 28년 만의 일이다. 그러나 1948년 약산은 자발적으로 월북했다. 이후 우리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1958년 11월 이후 북에서도 종적을 감췄다.
연단에 오른 중국 학자 "질문 있다, 김원봉이 왜?"
▲ 2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의열단 100주년 기념 한중일 국제 학술대회가 열렸다. ⓒ 김종훈
토론자로 참석한 석원화 복단대 교수는 연단에 올라 "질문이 있다"면서 "왜 약산 김원봉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하는 것인지, 남과 북이 독립운동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갖는 것이 남북통일의 대업에 도움이 되는지를 우선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물었다.
"한국은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독립운동에 대한 헌신으로 보는 게 아니라 좌우 또는 남북이라는 냉전적 사고의 잣대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해 지난해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한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피우진 전 보훈처장은 약산 김원봉을 서훈하려는 의지가 충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교체됐다"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법상 독립운동가에 대한 최종적 평가 기준은 1945년 8월 15일이다. 약산이 월북한 것에 대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법률로 정한 원칙과 권고조차 장벽에 부딪혔다. 논란거리도 아닌데 수구야당과 보수언론이 냉전적 사고로 논란거리로 만들었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애국가가 불리지 않았다.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오늘 행사에서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를 부르지 않은 것은 참으로 의미 깊다"면서 "이런 자리에서 친일작곡가 작곡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선조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나? 나는 삼일절과 광복절에 안익태의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게 솔직히 소름 끼친다"라고 강조했다.
"안익태는 만주국 환상곡을 작곡해 일본의 만주국 침략을 찬성했다. 그는 나치독일에도 찬성해 독일의 베를린 악단과 유럽을 돌며 일본을 찬양했다. 이런 사람이 작곡한 노래가 애국가가 됐다. 100년 전 일제가 뿌려놓은 친일의 씨앗이 지금은 한국의 애국가가 돼 울려 퍼지는 지금의 우리 모습을 보면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 의열단 시절 김원봉. 우측 끝이 약산 김원봉이다. ⓒ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