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숲 - 인지모 제151회 강좌
북간도 무장독립전쟁과 최운산 장군
최성주(최운산 장군 손녀)
최운산 장군(1885~1945)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세기 말 고종이 파견한 북간도 옌볜(延邊) 관리책임자(도태) 최우삼의 둘째 아들로 1885년 태어났다. 형 최진동, 동생 최치흥과 함께 1908년 동삼성(동북 3성)의 중국군 보위단에 군관으로 입대했다.
최운산은 왕청현 총대로도 활약했는데 동삼성 일대의 지적 정리 과정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광대한 황무지를 헐값에 불하받은 것이다. 최운산의 목장에서 키운 소들은 최소 100마리에서 수백 마리 단위로 훈춘을 거쳐 연해주로 팔려나갔다. 콩기름 공장 등 생필품 공장을 운영하며 북만주 제1의 거부가 되었다.
연길에서 봉오동으로 이주하여 신한촌을 건설한 최운산 장군은 1912년 비적(匪賊)으로부터 동포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당시 동북삼성의 지배자였던 장작림의 동의하에 봉오동에 100여 명 규모의 자위대를 창설하였다. 장작림 군에서 모집한 병사들은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이 사병부대가 정예 독립군‘도독부’로 거듭나면서 만주 무장독립군의 모체가 된다. 최운산 장군은 자위대를 자비로 운영했다.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에서 무장독립군이 되기 위해 북간도로 넘어간 애국 청년들을 모아 정예 무장독립군으로 양성했다.
1915년 봉오동으로 모여든 독립군이 수백 명에 이르자 함께 봉오동 산중턱의 나무를 벌목하고 개간하여 넓은 연병장을 만들고 숙소인 대형 막사 3동을 건축해 독립군을 수용했다. ‘도독부’의 본부인 자택 3천평 정도 둘레에 폭이 1m가 넘는 대형 토성을 쌓고 성의 네 귀퉁이에 각각 대포를 설치했다.
봉오동 독립군의 숫자는 계속 늘어났다.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창립되자 최운산 장군은 자신이 운영하던 독립군부대 ‘도독부’를 대한민국의 독립군 부대인 ‘대한군무도독부’로 재창설하였다. 형님인 최진동 장군을 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으로, 지략가인 동생 최치흥은 참모를 맡았다. 최진동 장군이 백초구 순경국장을 사직하는 등 일본과의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3형제가 무장독립군 부대 운영에 투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1919년 창설된 대한민국의 첫 군대 ‘대한군무도독부’는 670명 이상의 규모였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언했다. 일본군과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치르려면 대군단을 이루어야 한다는 판단을 한 최운산 장군은 만주의 독립군 모두에게 무기와 식량, 군복 등 군자금 일체를 제공하기로 약조하여 본격적인 대통합을 이루어 1920년 독립군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가 창설되었다. 대한군부도독부를 중심으로 ‘국민회’, ‘신민회’, ‘광복단’을 비롯한 각 독립군부대는 원 부대명 대신 ‘대한북로독군부’로 통합한 것이다. 각 대표들이 서약서에 서명한 날짜가 대한민국 2년(1920년) 5월 19일이다.
그들은 대한민국 군인의 신분으로 전투에 임했다. 김좌진·홍범도도 ‘대한북로독군부’의 1연대장과 2연대장이었다. 통합을 이룬 대한북로독군부 군은 두만강 변의 국경수비대 등 일본군의 주요 거점을 선제공격하는 등 수십 차례 국내 진공 작전을 시도했다.
독립군들이 봉오동으로 계속 모여들어 규모가 불어나자 봉오동 무장독립군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빨리 토벌해야 한다는 일제의 밀정보고서도 이어졌다. 결국 일본군은 봉오동의 무장독립군 기지를 토벌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출병시켰다. 그러나 최운산 장군의 첩보력은 이를 미리 감지했고, 이미 한 달 전에 주민들을 모두 소개시켰다. 천혜의 요새 봉오동의 지형을 이용하여 동서남북 각 산 위에 연대별로 진지를 구축하였고 참호를 파고 매복전에 돌입했다.‘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우연의 승리가 아니다. 봉오동에서 장기간 훈련 양성된 정예 무장독립군들이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독립군에게 일본군에 필적할 무기와 병력, 작전이 있었기에 당시 세계 최강이라는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규모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어떤 군대도 치밀한 준비와 훈련이 없이는 전쟁에서 쉽게 이길 수 없다. 지금도 군에서 실전 훈련을 거듭하는 이유는 언제일지 모르는 단 한 번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만주의 독립군도 그랬다. 일본군이 봉오동 독립군 기지의 상황과 만주 독립군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독립군에게 완패한 것이다.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는 대한민국 군대의 승리다. 봉오동 독립군은 1919년 임정 출범과 함께 남녀·귀천·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한 인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거듭났으며 대한민국에 승전의 역사를 선물했다. 봉오동 독립전쟁의 승리는 한일병탄으로 시나브로 패배의식에 젖어가던 국내외 애국세력의 가슴에 다시 횃불을 지폈다.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 회자되면서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던 ‘봉오동 전투’는 대한민국 군대가 소중하게 기억해야 할 첫 승전의 기록이다.
정리: 김재창(혜성여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