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의열단을 결성했다. 뉴시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견되는 의열단의 창단 100주년을 맞아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도움으로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들을 매주 소개한다.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에도 잊혀져만 가는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해 본다.
【서울=뉴시스】박차정 선생과 김원봉 선생의 결혼기념사진.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박차정(朴次貞, 1910~1944) 선생은 투철한 항일의식을 기반으로 학창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을 역임하며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에 섰다.
경술국치 해인 1910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선생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박용한(朴容翰)은 1918년 1월 일제 수탈에 비분강개해 자결했고, 첫째 오빠 박문희(朴文熺)는 신간회에서, 둘째 오빠 박문호(朴文昊)는 의열단에서 활동했다.
1919년 집 근처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을 보면서 항일의식을 숙명처럼 물려받은 선생은 1925년 4월 부산의 항일여성운동을 이끌었던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하면서 항일민족의식과 남녀평등사상을 더욱 고취시켰다. 학창 시절부터 남달랐던 선생은 재학 당시 차별적인 식민 교육에 항거해 동맹휴학을 주도한 혐의로 일제에 검거돼 투옥과 출옥을 거듭하기도 했다.
이후 1929년 11월3일 광주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1929년 10월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자 조선과 일본 학생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것이 도화선이 돼 전개된 항일운동이다. 11월3일 광주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돼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항일여성운동의 전국적 통일기관이었던 근우회(槿友會)에서 핵심간부로 활동하던 선생은 개혁적인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의 길을 모색해간다. 근우회는 여성의 단결과 지위향상을 이념으로 1927년 창립한 여성중심 독립운동단체다.
그러던 중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격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던 1930년 1월, 서울 시내 11개 여학교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일제에 항거하는 일이 벌어진다. 근우회는 1월 서울 여학생 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선생은 서울 여학생 시위사건과 연계된 이른바 '근우회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면서, 서대문형무소에서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병보석으로 풀려나게 된다.
이후 일제경찰의 감시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진 선생은 1930년 봄 의열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가 보낸 청년을 따라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으로 망명한다. 베이징 화북대학(華北大學)에서 공부를 하고, 의열단에 합류했다.
1920년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장 폭파 의거,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1922년 김익상 의사의 황포탄 일본육군대장 저격 의거, 1923년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1924년 김지섭 의사의 일본 궁성 이중교 폭탄투척 의거, 1926년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 의거 등 당시 조선 청년의 피와 목숨으로 이뤄낸 의열투쟁은 일제에 가장 두려운 공포였고, 조선인에게는 희망이었다.
【서울=뉴시스】동래일신여학교 시절의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photo@newsis.com
의열단에 합류한 선생은 1931년 베이징에서 안광천의 소개로 항일독립투쟁의 거두였던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과 결혼했고, 사랑과 혁명의 길을 함께 걸으며 본격적으로 의열단 핵심 간부로서 활약하게 된다.
1931년은 박차정, 김원봉 두 사람뿐 아니라 의열단에도 여러모로 변화가 필요한 해이기도 했다. 그해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대륙침략의 본색을 드러냈고, 의열단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격류 속에서 새로운 변화와 준비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의열단이 1932년 근거지를 난징(南京)으로 옮긴 뒤 선생은 김원봉을 도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개설에 앞장섰으며, 개설 후에는 이곳에서 여자 교관으로서 혁명의식 강화와 이론교육을 담당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이른바 '의열단 간부학교'라고도 불렸으며, 입학생들에게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 조선운동사, 한글, 조선역사, 한국지리, 비밀공작법, 폭탄제조법, 기관총조법, 실탄사격 등을 가르쳤다.
이곳에서 자란 청년투사들 일부는 민족해방투쟁에서 순교하기도 했지만, 나머지는 살아남아 조선의용대, 임시정부, 광복군 등에서 항일독입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동포여 울어도 소용없는 눈물을 거두고 결의를 굳게 하여 모두 일어서라. 한을 지우고 성스러운 싸움으로 필승의 의기가 여기서 뛴다"라는 내용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가' 노랫말을 선생이 짓기도 했다.
1935년에 접어들면서 김원봉은 난징에서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의열단, 대한독립당 등 좌우를 망라한 독립운동단체 5개를 통합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해 단결된 항일투쟁노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당시 '임철애'(林哲愛)라는 가명으로도 활동했던 선생은 김원봉이 이끈 조선민족혁명당의 지원단체인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조선의 모든 여성들이 총단결해 민족독립과 여성해방을 쟁취할 것을 독려한다.
【서울=뉴시스】박차정 선생 장례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photo@newsis.com
"우리 조선 부녀를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 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고, 또 우리를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다. 우리들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라는 남경조선부녀회 선언문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선생은 민족문제와 여성문제를 함께 고민해왔다.
1938년 10월10일 김원봉은 마침내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조선의용대'를 창설한다. 당시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중국의 수도 난징까지 점령하고 30만 민간인을 학살하는 '난징대학살'을 저질러 중국 민중의 항일의식이 타오르던 때였다. 김원봉은 때를 놓치지 않고 항일동맹군으로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그토록 염원하고 준비해온 항일무장투쟁의 길에 들어선다.
선생 또한 조선의용대에서 부녀복무단 단장으로 활약하며 항일투쟁의 선봉에 선다. 선생은 암울했던 시기에 여성임에도 최전선에서 총을 들고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진정한 독립운동가이자 전사였다. 그러나 선생은 1939년 2월 중국 장시성(江西省) 곤륜산(崑崙山) 전투에서 총상을 입게 되고,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조국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서른 넷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해방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현 국방부 장관) 자격으로 귀국한 김원봉은 박차정 선생의 유골을 가져와 경남 밀양 자신의 고향집이 내려다보이는 마을 뒷산에 안장한다.
선생이 못다 이룬 꿈은 자주독립과 민주혁명을 이룬 통일조국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후 연합국의 힘으로 해방된 조국은 미군정의 주도권 하에 있었고 소용돌이치는 정국 안에서 김원봉은 독립지사를 검거하고 고문하는 등 악명을 떨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는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한다. 역사의 모순이 빚어낸 참상이었다.
김원봉은 이러한 혼란기 속에서 고향 뒷산에 선생을 남겨두고 1948년 4월 9일 월북했고, 그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박차정과 김원봉은 분단과 이념의 대립 속에서 지워지고 나눠진 역사다. 박차정 선생은 사후 50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지만, 남편인 약산 김원봉은 광복 74주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과 북 그 어느 곳에서도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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