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육사 교수, 야스카와가 쓴 '봉오동부근전투상보' 분석
봉오동부근전투상보 야스카와 추격대가 작성한 '봉오동부근전투상보'. 오른쪽 페이지에 두 줄로 선을 긋고 자료를 수정한 흔적이 있다. [이상훈 육사 교수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1920년 6월 중국 지린성 투먼(圖們) 일대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싸움인 봉오동전투에서 일본인 사망자가 1명에 불과하다는 일본 기록을 신뢰하기 힘들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는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지난 2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연 봉오동·청산리전투 학술대회에서 일본 측 전과 자료인 '봉오동부근전투상보'를 분석해 발표했다.
봉오동부근전투상보는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 소좌 야스카와 사부로(安川三郞)가 1920년 6월 7∼19일 무렵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50쪽 분량 사료다.
이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 사망자는 1명이며, 부상자는 2명이다. 1920년 12월 25일에 나온 '독립신문'이 봉오동전투에 대해 일본군 전사자 157명, 부상자 300명이라고 밝힌 대목과 큰 차이가 난다.
이 교수는 발표문에서 "지금까지 봉오동부근전투상보 기록 자체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없었다"며 보고서 구성과 병력, 사상자 수 등 여러 면에서 의문점이 많다고 강조했다.
그는 봉오동부근전투상보에서 6월 6일 오후 4∼7시에 하탄동(河灘洞)에 집결한 일본군 추격대 수를 합산하면 230명이지만, 그날 오후 9시 30분에 월강(越江)을 준비할 때 병력은 250명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다음날 오전 3시 20분 추격 명령이 떨어졌을 때 병사는 209명이었다.
아울러 이 교수는 상봉오동에서 일본군 사상자는 단 한 명이라고 명시했는데, 이러한 기록은 4∼5시간 동안 치열한 교전을 벌인 끝에 나온 결과라고 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또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은 병사 이송에 12명이 동원됐다는 기록도 납득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군 추격대는 최초 투입된 병력과 중간에 편성된 병력, 최종 정리된 병력이 모두 다르다"며 "봉오동부근전투상보 자체가 시간에 쫓겨 제작돼 생각보다 치밀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20년 6월 10일자 기사 내용도 봉오동부근전투상보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매일신보는 "일본 사상병은 12명"이라고 전했다.
이 교수는 "봉오동부근전투상보는 일본군 보병대 중심의 추격대 상황만 기록돼 있을 뿐이어서 경찰과 민간인이 다수 소속됐을 것으로 여겨지는 토벌대 상황은 전혀 알 수 없다"며 "봉오동전투 당시 두만강 하류 일대에 500명을 초과하는 일본군이 집결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독립군 전과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독립군 측 전과 기록에 대한 검토와 봉오동전투 전개 과정에 관한 심도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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