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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중부일보] 좌우를 아우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고자 한 김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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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11-21 13:55 조회7,27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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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를 아우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고자 한 김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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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김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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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광복을 위해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하고 정의와 대중복리를 위해 모든 사회악과 싸우며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이상과 지조로써 살고 간 이가 계셨으니 운암 김성숙 선생이시다."(김성숙의 묘지명)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김성숙이 남양주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1919년 3.1운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고, 3.1운동을 주도하였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님 웨일즈가 쓴 한 독립운동가의 전기인 ‘아리랑’에서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로 소개된 김성숙(1898∼1969)이다.

김성숙이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919년 남양주 봉선사 승려로 있으면서 남양주와 포천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하면서 부터이다. 봉선사 승려들과 3월 30일 양주군 광릉천 시장 만세시위와 3월 31일 광릉천 자갈마당에서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1년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김성숙이 출옥할 무렵 식민지하 조선사회는 사회주의가 유행하였다. 김성숙도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조선무산자동맹과 노동공제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김성숙은 1923년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김성숙이 중국망명을 처음 시도한 것은 1916년이다. 부친이 땅을 팔아 모아둔 돈을 가지고 집을 떠났다. 원산을 거쳐 청진으로 가서 두만강을 건널 계획이었는데 일본군 국경수비대의 경계가 삼엄하여 포기하였던 것이다.

망명 후 김성숙은 민국대학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1923년 봄 북경 YMCA회관에서 한인 유학생의 난상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성숙은 해박한 지식과 이론을 내세워 청중들을 압도하여 유학생사회 내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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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함께 조선의열단, 조선의용대 활동을 하다

1923년 조선의열단에 가담하여 선전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의열단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김성숙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인물이 있었다.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가 바로 그 인물이다. 김성숙은 신채호를 두뇌가 비상한 천재여서 삼국유사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였다고 기억하였다. 그리고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여 의열단이 나아갈 길을 분명히 제시하였고, 정의감이 강하고 신념이 투철하여 의열단 동지에게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고 회고하였다.

1927년 중국공산당의 광주봉기에 참여한다. 1931년에는 반제동맹에 가입하고 기관지 ‘봉화’ ‘반일민중’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하는데 참여하였고, 기관지 《민족전선》을 간행하였다. 1938년 김성숙은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맡아서 기관지 ‘의용대 통신’을 발간하였다


통합을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국무위원이 되다

김성숙이 일생 걸었던 길은 좌우합작으로 가는 길이다. 김성숙은 좌우가 이념적 지향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힘들더라고 합작의 길을 가여한다고 믿고 행동하였다.

중국내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분열되어 있었다. 민족주의진영은 한국광복전선을, 진보진영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히여 서로 대립하였다. 1940년 무렵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전적 해소론까지 대두되었다. 이때도 김성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중심의 대동단결을 주장하였다.

김성숙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의 참전으로 한국의 해방 가능성이 높아지자, 좌우로 분열된 항일민족운동 전선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2년 김성숙은 좌우가 합작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국무위원을 맡았다.

1945년 독립운동가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 정국은 분열의 죔이 있었다.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환국을 하는데 그 직전 열린 임정의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김성숙은 좌우합작을 원칙으로하는 ‘약법3장’을 제안하여 통과시켰다. ‘약법 3장’은 환국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해서 제시한 것이다



1. 임정은 좌우 양파를 아우른다

2. 환국 즉시 각 정당 사회단체와 반일인사 참여시켜 임정을 확대 개편한다

3 미국과 소련과 평등한 원칙의 외교관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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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4회 의원 기념사진(1942.10월) 3번째 중 중앙 



분열하고 대립하는 해방 정국에서 통합의 길을 걷다

시간이 갈수록 해방 정국은 더욱 분열 대립하였다. 1946년 신탁통치 문재가 불거지면서 좌우대립은 격화되었다. 이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우익 중심으로 비상정치회의 구성하자, 김성숙은 김원봉 등과 함께 이를 비판하고 임정과 결별하였다

김성숙은 1946년 좌익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고 부의장을 맡았다, 좌우합작 노력을 전제로 부의장을 맡았는데, 좌우 대립이 격화되자 부의장직을 사퇴하였다.

김성숙은 이 시기 미군정을 비판하다가 3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1947년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좌우 진영 모두를 비판하고 독립노동당을 창당해 당수가 되었다.



남북으로 갈라진 독립운동가의 삶

해방이 되면서 함께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남북으로 갈라진다. 남한은 민족주의, 자본주의 길로 북한은 사회주의 길을 간다. 남한은 이승만 세력이 중심이 되고, 북한은 김일성 세력이 중심이 된다. 북의 정권 수립에 참여한 이는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세력, 무정 등 연안파, 박헌영 등 국내파, 쏘련파이다. 그러나 1956년 김일성의 권력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연안판, 국내파, 쏘련파는 숙청된다.

남한에서도 냉전 체제가 굳어지면서 김성숙처럼 혁신운동을 하는 이들의 삶도 팍팍해진다. 김성숙은 1955년 진보당 추진위원회에 관계하면서 혁신정당 창단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근로인민당 재건사건과 진보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다. 1960년 4.19 이후 혁신정당이 창당되면서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김성숙은 이 일로 인해 1961년 5.16 이후 옥고를 치른다.


피우정에 살다간 간 김성숙

1969년 김성숙은 피우정에서 서거하였다. 집 한칸 갖추지 못한 어려운 생활을 하는 김성숙에게 동료들이 비나 피하라는 의미로 지어준 ‘피우정(避雨亭)’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뒤늦게 독립운동가로서 인정을 받아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이하는 금년은 김성숙 서거 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제 김성숙의 생애를 한국근현대사, 나아가서 동아시아 근현대사 속에서 조망할 때가 되었다. 김성숙은 1927년 중국공산당의 광주 봉기에 참여하였다. 한국의 독립을 위한 방편이었지만, 한국인으로서 중국공산당의 광주 봉기에 참여한 것은 김성숙이 동아시아인이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20세기 한국사를 관통하는 단어는 식민지, 그리고 냉전과 분단이다. 이 두 개의 키워드를 온 몸에 껴안고 살았던 인물이 김성숙이다. 그래서 그는 항일독립운동가, 좌우합작운동가, 혁신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3.1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중국으로 망명 후 항일무장단체인 의열단과 조선의용대 조직에 참여하여 항일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1942년 좌우가 합작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고, 1945년 이후 갈수록 좌우가 대립하는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운동을 펼쳤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냉전체제에 저항하며 혁신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김성숙의 생애는 한마디로 가시밭길 인생이었다. 그러나 한국근대사의 과제를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살았던 역사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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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에서 찍은 김성숙 가족 사진. 뒷줄 가운데가 김성숙과 부인 두쥔후이, 앞줄 왼쪽이 둘째 아들 두젠씨


강진갑(경기학회장,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