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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이곳을 보고서도 '반중' 외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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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2-10 12:59 조회6,92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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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은 3.1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의미 있는 해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임시정부가 걸었던 '임정로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 102주년에도 그 발걸음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역시 지난 1월 9일부터 5박 6일 동안 청년백범 14기 답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광저우~충칭에 이르는 임정로드를 탐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길 위에서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들께 공유하고자 <오마이뉴스>에 답사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동교장 터에서 한·중 우의를 생각하다

중국 광저우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광둥성 인민체육장'. 평범한 축구 경기장처럼 보이지만, 이곳에 얽힌 역사를 알면 가슴이 뭉클해질 수밖에 없다.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최초로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은 '동교장(東較場)'이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1921년 10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이자 외무총장이었던 예관 신규식은 중국 호법정부의 총통 손문(쑨원)과 회담을 한 후, 18일에 동교장에서 정식으로 국서를 봉정(奉呈: 문서를 올림)한다. 이후 호법정부는 의회의 결의를 거쳐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한다.

< 임정로드 4000km>의 저자인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는 동교장을 "건국절 논란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곳"이라고 강조한다. 건국절 운운하는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건데, 임시정부는 1921년에 이미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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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단이 동교장 터에 방문했을 때는 이미 축구 경기장으로 바뀌어 있었기에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광저우까지 날아와 우리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노력했던 신규식과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을 임시정부 요인들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 한 구석이 메어왔다. 지금 그 건물이 남아 있고 없고가 그리 중요할까. 그 자리에 깃든 역사를 잊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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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지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武漢)에서 시작됐다는 이유만으로 반중(反中) 감정에 휩싸인 한국 사회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든다.
어려웠던 시기 기댈 곳 없는 망명객들을 받아준 중국인들의 우의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과연 27년 동안이나 정부를 유지하고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었을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본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늘 우리 임시정부를 보호하고 응원하며 직·간접적으로 후원했다.

 

인류애의 관점에 비춰봐서라도 어려운 위기에 처한 이웃을 돕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일이다. 그럼에도 중국에 마스크 하나 보내는 것까지도 결사반대를 외치며, 혐중을 부추기는 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한숨만 쏟아질 뿐이다. 동교장에 얽힌 사연을 알고 나서도 그들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원조 CC' 김성숙과 두군혜의 로맨스가 깃든 '중산대학'

1924년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반봉건 군벌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로 제1차 국·공합작이 이뤄졌다. 그 결과 장교 양성을 위한 '황포군관학교'와 지식인 양성을 위한 '광동대학'이 설립된다(광동대학은 손문이 죽고 난 후, 그를 기리기 위해 손문의 호인 중산을 따서 '중산대학'이라 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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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대학은 중국의 대문호인 노신(루쉰·魯迅: 1881~1936)이 교편을 잡은 바 있어, 지금은 '노신기념관'으로 탈바꿈한 상태다. 2층에는 노신의 숙소와 교실 등을 복원해 놓았고, 노신이 학생들에게 '판화 제작'을 지도하는 장면도 실물 크기로 재현해놓아 생생함을 느끼게 한다.

 

중산대학 강당에 서면 감개가 무량해진다. 장강의 물결과 같은 중국 근대사의 도도한 흐름 위에 선 느낌이랄까.

 

2층으로 올라가 강당을 내려보고 있노라니, 1층에서 답사단원들에게 한창 강당의 의미를 설명하던 민족문제연구소 광둥지부 박호균 사무국장이 내가 선 쪽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바로 저 자리가 약산 김원봉 선생이 서 있던 자리입니다!"

알고 보니 김원봉과 권준(의열단원)은 바로 이 2층에서 국·공합작이 결정되는 역사적인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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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이곳에 서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는 장면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리 독립운동가들도 하나로 뭉쳐야 한다!'라고 생각하면서 주먹을 꽉 쥐진 않았을까.

중산대학은 황포군관학교와 마찬가지로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낸 인재 양성의 요람이기도 했다. 몽양 여운형은 장개석(장제스)을 만나 중산대학과 황포군교에 한인 학생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고, 장개석의 허가로 많은 한국 청년들이 앞다투어 입교했다.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성향에 따라 총 혹은 펜을 택했다. 군인이 되고자 했던 김원봉과 김산 등은 황포군교에 입교했고, 이론가였던 김성숙과 시인 이육사는 중산대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황포군교와 달리 중산대학 전시실에는 한국인 학생들이 재학했다는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중산대학하면 '김성숙·두군혜' 커플의 로맨스를 빼놓을 수 없다. 김성숙은 중산대학에서 중국인 두군혜(두쥔훼이·杜君慧: 1904∼1981)를 만났다. 두 사람은 금세 사랑에 빠졌다. 요즘 말로 CC(캠퍼스 커플), 그것도 국제 CC였던 셈이다.

중산대학 캠퍼스를 거닐며 사랑을 속삭이고 혁명을 이야기했던 두 사람. 하지만 해방 후 환국하면서 김성숙은 "다시 찾으러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해방 후의 불안정한 정세로 결국 원치 않는 이별을 해야만 했던 두 사람의 로맨스는 가슴 절절하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와 중산대학이 중산대학 캠퍼스 내에 '김성숙·두군혜기념관'을 건립하는 데 합의하고 건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에 다시 이곳을 방문할 때는 두 사람의 로맨스를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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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는 왜 광저우로 갔을까

신규식의 동교장 방문 17년 만에, 임시정부는 광저우와 다시 연을 맺게 된다. 피난길에 오른 임시정부가 1938년 7월 광저우에 잠시 머무르게 된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 내에서는 베트남으로 망명하자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회고록인 <장강일기>에도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정정화는 베트남 망명에 대해 "소수의 주장이었고, 가당치 않은 착상이었다"라며 단호하게 비판하고 있다. 반(反) 식민투쟁을 벌이는 임시정부가 식민지배 하에 있는 베트남으로 망명한다는 것은 모순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임시정부는 왜 광저우로 갔을까?

근처의 홍콩과 윈난(운남·雲南) 등지에서 수시로 대외 정보를 취득하거나, 연락선을 확보하기 위해 유리한 지점인 광저우로 왔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김구 역시 홍콩으로 업무를 보러 떠나기도 했단다(박광일 저,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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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처음부터 광저우행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고, 우연히 그렇게 가게 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윈난성 쿤밍(곤명·昆明)으로 가려다 교통 편과 여비 문제로 부득이하게 광저우로 갔다는 것이다(<백범의 길> 서울대 국사학과 은정태 박사의 글 참조).

임시정부의 광저우행이 우연이었든 아니었든 임시정부는 어차피 광저우에 오래 머물 처지가 못 됐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위협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저우 '동산백원' 앞에 작은 표지석 하나 세웠으면

2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임시정부가 광저우에 머무를 때 쓰던 청사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바로 '동산백원(東山柏園)'이다. 그런데 이 건물이 발견된 게 불과 3년 전인 2017년의 일이라 한다.

지금은 중국 현지인들이 살고 있는 가정집으로 변한 동산백원은 생각보다 잘 보전된 상태였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치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앉아서 담뱃대를 물고 있을 듯한 풍경이 그대로 펼쳐진다.

 

동산백원은 건물 외형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아쉽게도 한국 임시정부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잠깐 머물렀던 곳이라고는 하나, 우리에게는 귀한 장소다. 기존에 남아 있던 유적지들도 사라지는 마당에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장소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 정부가 나설 차례다. 중국 정부와 협의하여 작은 표지석 하나라도 세워주길 바란다.

 

동산백원을 끝으로 광저우에서의 일정이 마무리가 됐다. 우리는 다음 코스인 류저우(유주·柳州)로 이동하기 위해 고속열차에 올랐다. 광저우를 떠나며 이곳에서 보낸 1박 2일을 되돌아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광저우라는 도시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꾸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의 뒤를 이어 이 길을 걸어갈 많은 한국인들이, 더 이상 이곳을 황비홍과 엽문의 고장으로만 기억할 게 아니라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웅지를 품고 활약한 혁명의 도시로 기억하고 그 흔적을 ♡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아니면 누가 이 역사를 기억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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