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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박정희의 열등감이 부른 비극? 의문투성이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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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4-03 11:07 조회6,48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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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함석헌(1901-1989) 생전에 장준하(1918-1975)에 관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우리는 참 아까운 인물을 잃었습니다"라고 함석헌은 늘 아쉬워하고 가슴 아파했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게도 장준하를 직접 만나 본 적은 없다. 장준하의 자서전 <돌베개>를 그의 사후에 감명 깊게 읽었고 함석헌과 그 지인들이 쓴 장준하에 대한 글을 읽고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지금도 안 잊히는 이야기 중 하나는 장준하의 지인인 통일운동가 이행우 선생(1930- )이 들려준 이야기다. "한 번 식사 시간에 우연히 장준하 국회의원 집을 방문하고 너무 놀랐지. 그래도 명색이 국회의원인데 장 선생이 식사하는데 글쎄 반찬이 깍두기 하나밖에 아무것도 없더라고..." 당시 장준하는 부인과 3남 2녀의 가장이었다. 하지만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그는 남을 돕느라 단 한 번 월급봉투를 집에 가져온 적이 없다고 한다.

나는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에 몸담으면서 '장준하 사건 보고서'와 관련 기자회견 등을 보고 들으며 장준하의 인품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되었다.

장준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또 그는 왜 1975년 박정희 정권 하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리고 그의 사후 45년이 되도록 우리는 왜 아직도 그가 어떻게 목숨을 잃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일까?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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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일제강점기 광복군 활동을 통해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해방 직후 1945년 9월 광복군 장교인 장준하가 중국 서안에서 일본군 출신 박정희를 우연히 만나 질타했고 그것이 박정희가 장준하에 대해 평생 심한 열등감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는 일설이 있다.

해방 후 장준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사지라 할 수 있는 <사상계>를 통해 민주화와 언론자유에 기여한다. 그리고 함석헌은 <사상계>를 통해 당대의 민중들을 위로하고 심금을 울리는 필력을 휘두르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때부터 둘의 관계는 바늘과 실처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누구보다도 돈독한 관계가 된다.

 해방 후 장준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사지라 할 수 있는 <사상계>를 통해 민주화와 언론자유에 기여한다. 그리고 함석헌은 <사상계>를 통해 당대의 민중들을 위로하고 심금을 울리는 필력을 휘두르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때부터 둘의 관계는 바늘과 실처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누구보다도 돈독한 관계가 된다.

1967년 신민당 국회의원에 당선된 장준하는 1969년부터 박정희의 '3선 개헌반대 투쟁위원회' 선전부장으로 박정희 3선개헌 반대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다. 1972년 박정희는 국회를 무력화시키고 언론을 탄압하는 유신헌법을 선포한다. 그다음 해인 1973년 11월 장준하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운영위원으로서 서울 YMCA에서 대표위원인 함석헌 등과 함께 "민주 질서의 회복을 위해 우리들은 총궐기 투쟁하겠다"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한다.

이어서 그해 12월 장준하는 백낙준·유진오·김수환·한경직·김재준·함석헌 등과 함께 YMCA에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헌법을 1972년 10월 17일(10월유신) 이전으로 복원시키도록 개헌을 해야 된다"고 결의한다. 그리고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그해 12월 26일 국무총리 김종필은 전국에 중계된 텔레비전과 라디오 생방송을 통해 "개헌서명운동 등 소요선동을 준엄히 다스리겠다"고 경고한다. 이어서 그달 29일에는 박정희가 직접 나서 "현 체제를 전복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을 즉각 중지"하라고 협박한다.

이런 박정희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반유신체제 열기가 높아지자 박정희는 마침내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2호를 발표한다. 그리고 1974년 4월 반유신운동의 1등 주자 장준하는 즉시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15년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그해 12월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인한 형집행정지로 장준하는 석방된다. 하지만 출감 후에도 장준하는 계속 개헌운동을 전개한다.

그러자 중앙정보부(아래 중정)는 장준하에 대해 24시간 자택전화 감청 및 미행, 감시 등 지속적인 관찰을 한다. 그러던 중인 1975년 8월 20일 제2의 100만인 개헌 서명운동이라는 거사를 추진하던 중, 거사예정일을 불과 3일 앞둔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로 사체가 발견된다.

추락사 흔적 없는 추락사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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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검찰은 장준하가 등산 중 추락사한 것이라고 발표한다. 하지만 사체에서는 추락사 흔적을 조금이라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장준하의 사체는 발견 당시 반듯하게 누워 있었고 입고 있던 의복에는 미끄러지거나 긁힌 흔적이 전혀 없었다. 또한 사체 주변에 놓여 있던 장준하의 안경, 등산모자, 등산가방, 보온병 등은 깨지지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 긁힌 흔적조차 없었다. 당시 보온병은 내부가 지금처럼 스테인리스가 아니라 예민한 유리여서 조그만 충격에도 잘 깨졌다.

필자가 몸담았던 의문사위 조사에 따르면 장준하 사고 당일인 1975년 8월 17일 오후 5시경 중앙정보부 요원 몇 명이 사고현장에 출동해 포천경찰서 이동지서 소속 순경인 이아무개에게 "안 본 것에 대해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라고 주의를 준다. 또한 육군 5군단 헌병대 수사과 속보병과 수사계장이 사고현장에 와 상황 파악 후 상부에 보고했으며, 105보안부대장도 현장상황 파악 후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하는 등 군 수사기관과 중정 직원이 현장에 출동해 사건의 정황을 파악했다.

당시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현장검증을 나온 의정부지청 서아무개 검사는 검안의로부터 사인 관련 진술을 들은 후 약 5분 만에 현장검증을 마치고 부검도 실시하지 않았다. 사건 다음 날 목격자라는 김용환에 대한 조사 결과만을 근거로 추락사로 내사종결 해 장준하에 대한 변사사건 수사가 아주 급하게 졸속으로 처리되었다.

의문사위 조사 결과 당시 목격자라는 김용환은 장준하와 같이 시간적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경로로 산행을 했다고 진술했다. 또한 장준하의 추락사 장면이나 사망경위에 대한 김용환의 진술도 일관성과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김용환은 사고 당일 오후 5시경 갑자기 현장에서 사라졌다가 다음날 새벽 1시경 서아무개 검사의 현장검증에 다시 나타났는데 그 사이 행적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김용환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장준하 유족에게 당일 오후 3시경 사고 사실을 전화로 알려 준 것이 김용환으로 밝혀졌다. 이외에도 김용환의 사고 전후의 행적에 의심스러운 면이 많다는 점도 의문사위는 밝혔다.

또한 당시 중정 3계장 박아무개는 장준하에 대한 정보수집을 위해 사설정보원(Private Personal Agent, 아래 P/A)을 고용한 바 있는데 김용환도 장준하 관련 P/A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훗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하지만 이런 진술에도 불구하고 P/A를 직접 관리한 중정 요원에 대한 조사가 지난 2004년 의문사위 조사기한 만료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아 김용환이 당시 중정에 장준하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P/A였는지 여부에 대해 의문사위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당시 장준하에 대한 정치공작에 관련된 중정 직원 이외에 에이전트(사설정보원) 또는 프락치(망원), 밀고자나 하수인 등이 있다. 그러나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원(과거 중정)은 당시 의문사위 협조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신상 공개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신상만 확인이 된다면 장준하 사건의 진실규명에 도움이 되고 나아가 장준하 타살에 직간접적으로 가담, 조력하거나 책임진 자들을 밝혀내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일관되게 국가안보 또는 개인의 인격권 보호 등을 핑계로 당시 의문사위의 요청에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시 중정을 비롯한 국가정보 공안기관에는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장준하, 함석헌 등을 감시 전담하는 팀과 책임자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의문사위의 협조 요청에도 그들의 신상정보를 일절 제출하지 않았다. 반면, 김대중 납치사건에서는 지금 그 공작팀의 책임 실무부서와 신상정보가 거의 공개적으로 인지되고 있다. 결국 장준하 선생은 죽어서도 국가기관에서 차별받고 있는 것인가?

장준하 추모식도 방해한 박정희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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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위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70년대 당시 장준하의 행적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있던 중정은 장준하 의문사 사고 현장 부근에서 출동한 경찰관에게 압박을 가하는 등 중정 직원들이 사고 현장에 출동하고, 장준하 변사기록을 포천 이동파출소에서 복사해 갔다. 그리고 중정은 이후 언론취재 과정에 개입해 취재중단, 의혹 제기 기사를 쓴 기자를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하거나 회유 혹은 협박하려는 조치를 취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장준하 의문사 이후에도 중정은 장준하의 유족들을 끊임없이 감시, 협박, 심지어 폭행하고 장준하의 추모식조차 방해했다. 이런 점은 당시 중정이 장준하 의문사 사건과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개입했고 장준하 사건을 은폐 또는 조작하기 위해 계속 시도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장준하의 일상 동정은 중정에 의해서 시간별로 기록되고 보고되고 있었다. 의문사위는 심지어 '장준하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 보고사안'이라는 진술을 확보했다. 그런데 의문사위에서 국정원(과거의 중정)에 요청해서 받은 일부 자료에는 장준하 의문사 당일에만 기록이 다른 문건으로 바꿔치기 되거나 아예 빠져 있었다.

장준하에 대한 감시를 계속하면서 매일매일 동향을 보고하고 있던 중정이 정작 장준하 사망 당일인 1975년 8월 17일에는 오후 9시경 '중요상황보고' 하나의 문서만 작성되어 보고되었다면서 다른 보고문건의 존재를 부인하고 의문사위에 제출을 거부했다.

이러한 국정원의 태도는 오히려 당시 장준하의 사망에 당시 중정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증거가 아닐까? 가해자가 자신이 정말 결백하다면 혐의를 풀기 위해서라도 피해자들에게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보여주는 것이 상식적,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가? 피해자에게 증거는 은폐하면서 가해자가 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국정원만 모르는 것인가?

한편, 의문사위는 장준하의 사체가 발견된 현장의 벼랑에서 추락할 경우 시체 손상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홍익대학교 최형연 교수팀에게 컴퓨터 시뮬레이션 연구를 의뢰했다.

추락지점으로 일컬어지는 지형에서 12가지 추락 자세 형태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 두부에는 12가지 모든 경우에 최소 3회 이상의 충격이 가해져 좌상 및 타박상과 골절이 나타났으며, 흉부(정면과 측면)는 11가지의 경우에 좌상 및 타박상이 나타나고 10가지 경우에 골절이 나타났으며, 둔부 상지 하지 중 한 곳에서라도 골절이 발견되는 경우는 9가지였다.

장준하 사건 재조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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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장준하 사체를 검안했던 조철구 의사의 시체검안 소견이나 당시 유족이 촬영해 두었던 시체 사진에 의하면 두부에는 직경 2센티미터의 우측 함몰 이외에는 두부나 늑골 팔다리에 골절이 없고, 흉부에도 외상이 없는 등 시뮬레이션 결과와 큰 차이를 보였다. 즉, 이 결과에 따르면 장준하는 추락사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의문사위는 판단했다.

또한 의문사위는 장준하 사건 목격자라고 주장했던 김용환이 진술한 바와 같이 현장에서 추락해 사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요인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장준하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칼날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반독재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중정 등 정보기관의 표적이 되어 끊임없는 감시를 받는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정 정보원으로 의심되는 김용환과의 산행에서 도저히 추락사로는 보기 어려운 의문사를 당했고, 이후에 이루어진 사건의 처리 과정에도 중정이 깊숙이 개입했던 것으로 의문사위는 판단했다.

특히 국정원은 814쪽에 달하는 장준하 사건 관련 추가 존안 자료를 은폐하고 있다가 의문사위 조사 활동 종료를 한 달 앞둔 지난 2004년 5월 1일에 이르러서야 의문사위에 제출했다. 이로 인해 국정원이 제출한 추가 존안 자료와 관련한 조사가 의문사위 조사 기간 만료로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의문사위는 사건 당시 한아무개 105보안부대장이 사건 현장을 방문한 후 보안사령부 본부에 16절지 분량으로 텔레타이프를 통해 보고한 장준하 사망 관련 문서의 존안 사실을 확인했고 그래서 기무사령부(전 보안사령부)에 관련 자료를 요청했다.

하지만 기무사령부는 이런 문서의 존안사실을 아예 부인했다. 그 결과 결국 노무현 정부의 의문사위는 국정원, 기무사 등 국가정보기관의 비협조 등으로 인해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결국 장준하 의문사에 공권력 개입 여부를 밝히지 못했다.

의문사위의 장준하 사건 조사관이자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의 저자 고상만은 "결국 진실화해위원회법이 다시 만들어져야 장준하 사건에 대한 조사가 다시 가능하고 그래야 장준하 의문사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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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김성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