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표하자 동아일보는 다음날 사설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 노린 좌파史觀(사관) 친일사전”을 통해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것은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과거 공산주의 단체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전력이 있고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화에 이바지한 인물을 상처내기 위해 친일파 작업에 돌입했다며 인명사전 발표 배경을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등에 게재된 징병 권고문 등을 문제 삼아 김성수 전 부통령을 친일 명단에 포함했는데 당시 글들은 조선 사회의 지도적 인사들을 전쟁 동원에 앞세우기 위해 이름을 도용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학생들도 ‘교장으로 있던 인촌이 학병에 나가라고 한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다”고 했다.
김성수가 만든 동아일보는 100년 전인 1920년 4월1일 민족지를 표방하며 출발했고,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한 손기정 선수 사진을 보도하며 일장기를 지운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무기 정간을 당하는 등 조선총독부 탄압을 감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사세를 확장한 조선일보와 차이를 보인 게 분명해 김성수와 방응모,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단순 비교할 순 없다.
이승만 독재에 항의하는 의미로 부통령직을 사퇴하거나 건국훈장을 받은 사실 등 김성수를 보통의 친일파의 행적과는 다르다는 의견이 힘을 얻는 면도 있다. 다만, 역사책 한쪽에 친일파라는 평가 자체를 지울 순 없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에서도 김성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김성수의 증손자인 김재호 동아일보 대표와 인촌기념회는 이를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동아일보 측은 김성수가 징병을 권유한 글이 허위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망인(김성수) 관련 기사들(징병 독려 글 등)이 모두 명의가 도용됐거나 허위 조작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며 “망인이 3·1운동에 참여하고 동아일보사나 보성전문학교 등을 운영하며 민족문화의 보존과 유지·발전에 기여한 성과가 적지 않더라도 이 같은 사정과 원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로 친일 행적의 주도·적극성을 감쇄시킬 정도로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친일행위에서 제외한 활동은 김성수가 1941년 ‘황국정신 앙양(북돋움)’을 위해 만든 흥아보국단 준비위원 활동, 1937년 중일전쟁기에 라디오강좌와 강연회를 통해 시국인식을 철저히 할 것을 역설한 것, 군용기 건조비로 300원 헌납한 사실 등이다. 1943~44년 매일신보에 출정 군인 유족에 대한 원호사업을 철저히 시행하고 협력할 것을 역설한 부분도 친일활동에서 제외했다.
미디어오늘은 판결 취지와 언론사 사주라는 점을 고려해 친일인명사전 내용 중 언론 활동 중심으로 김성수 행적을 살펴봤다.
김성수는 1891년 10월11일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914년 7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고 같은해 10월 조선총독부에서 경성방직 설립 인가를 받고, 동아일보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 7월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 일했고, 1936년 11월 ‘일장기 말소사건’ 여파로 취체역(주식회사 이사에 해당)에서 물러났다.
친일인명사전에선 김성수를 보성전문학교 교장과 동아일보 사장으로 소개했다.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뒤 약 3년간 교장으로 활동했고, 1937년 다시 교장 자리로 돌아왔다. 김성수는 1938년 7월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에 참여해 이사를 맡았다. 1939년 4월엔 경성부 내 중학교 이상 학교장 자격으로 신설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를 맡았다. 1941년 조선방송협회 평의원과 조선사회사업협회 평의원도 겸임했다.
그는 조선에서 징병제를 실시하자 1943년 8월5일자 ‘매일신보’에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는 격려문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징병제를 실시해 조선인이 이제 황국신민이 됐다며 지난 500년간 문약했던 조선 분위기를 일신할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같은해 11월6일 매일신보가 주최하는 ‘학도출진을 말하는 좌담회’에서도 지원율이 저조한 이유를 ‘조선인의 문약한 성질’이라고 했다.
같은해 11월7일 ‘매일신보’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란 글에서는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독려했다. 여기서 의무란 “대동아 성전에 대해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로 살면서 받은 국가·사회·가정 혜택에 보답하는 것이다. 김성수는 학병에 지원하지 않아 ‘대동아건설’에 동참하지 못하면 일본인 즉 ‘내지’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달 20일 학병지원 마감일을 맞아 ‘경성일보’에 ‘학병 미지원자는 원칙대로 징용돼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고, 12월10일 매일신보에 한 사람도 주저없이 “광영스러운 군문으로 들어가는” 징병검사에 나설 것을 권유했다. 또 같은달 17일 보성전문학교 학도지원병 예비군사학교 입소식에서 “제군은 세계무비의 황군의 일원의 광영을 입게됐으니 학도의 기분을 버리고 군인의 마음으로 규율있게 생활하라”고 훈시했다.
김성수는 해방 후 1946년 1월 동아일보 사장에 다시 취임했고, 송진우(한국민주당 초대 수석총무, 독립운동가) 사망으로 공백이 된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선출됐다. 같은해 2월 보성전문학교 교장, 이듬해 2월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했다. 1949년 2월 민주국민당을 창당해 최고위원이 됐고, 같은해 7월 동아일보 고문을 맡았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6월 대한민국 부통령으로 선출돼 이듬해 5월까지 일했고, 1955년 2월18일 세상을 떠났다.
1962년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승인을 거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동아일보 측이 반민규명위(정부)를 상대로 김성수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것을 취소하라는 소송에서 대법원이 2017년 4월 동아일보 측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판결을 반영해 지난 2018년 2월13일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서훈을 박탈했다. 김재호 동아일보 대표와 인촌기념회는 서훈박탈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에 나섰지만 지난 2월 서울행정법원은 동아일보 측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