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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봉오동 전투 숨은 주역 최운산이 바로 최문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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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4-20 15:56 조회6,4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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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서훈을 받은 최문무도 있고, (1990년) 서훈을 받은 최운산도 있어요. 둘은 같은 인물입니다."

봉오동 전투의 숨은 주역인 최운산(崔萬益, 1885~1945) 장군의 손녀 최성주씨의 주장이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따르면, 최운산의 본적은 중국으로 최진동의 동생이다. 일찍이 만주에 망명하여 삼형제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이 지린성(吉林省)에 터를 잡았다. 1919년에는 삼형제가 무장단체인 도독부 및 독군부를 조직했는데, 최운산은 여기에 군자금 5만 원을 보탰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했고, 이후에 벌어진 후속 전투에도 참가해 일익을 담당했다. 

한편 최문무에 대해서는 본적은 함경북도 온성으로, 1917년경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0년대 초반 대한북로독군부에 들어간 것으로 나온다. 최문무는 1920년 대한북로독군부 모연대장으로 활동했고, 이후 계속해서 군자금 모금 활동에 투신했다. 1925년 체포되어 동년 2월 30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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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씨의 주장에 따르면 1990년 국가보훈처로부터 애족장(5등급) 포상을 받은 '최운산'과 2008년 애국장(4등급) 포상을 받은 '최문무'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는 동일인물을 두 명으로 쪼개서 서훈을 한 것이기에 사실일 경우, 보훈처의 공적 심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황당한 이야기의 진실은 뭘까? 지난 13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최성주씨를 만났다.


최운산은 누구인가?

연변 도태(연변에 살던 조선인들을 다스리던 관리)였던 부친 최우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최운산은 어릴 적부터 무예와 사격술 등을 연마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만주 지역 군벌이었던 장쭤린(張作霖) 휘하에서 군사훈련 책임자로 활동했는데, 나중에 장쭤린으로부터 사병 부대 창설을 허락받아 '자위대'를 창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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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은 장쭤린 부대에서의 군대 운용 경험을 바탕으로 무장독립군 양성기관인 '봉오동사관학교'를 창립했다. 또한 1919년 자위대를 '대한군무도독부'로 개칭하고, 맏형이었던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추대한 뒤, 본인은 참모장에 보임됐다.


"흥미로운 점은 '대한민국'의 군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름을 '대한군무도독부'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군무도독부의 규모는 670여 명이었고, 1912년부터 러시아에서 구입한 무기들로 완전무장한 상태였습니다."


최씨 삼형제가 이끄는 군무도독부는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洪範圖, 1868~1943)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안무(安武, 1883~1924)의 국민회군(國民會軍)과 연합,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한 뒤 한경세(韓景世)의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과 함께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를 대파하는 장쾌한 승리를 거뒀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는 우리 독립군이 초라한 복장을 입고, 수적 열세에 몰린 상태에서 힘겹게 일본군을 격퇴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그러나 최씨는 "영화는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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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에 따르면 당시 독립군은 대규모의 인원과 신식 무기, 깨끗한 군복으로 무장한 정예부대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간도 지역 거부였던 할아버지 최운산의 재정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할아버지(최운산)는 콩기름공장부터 시작해서 국수공장, 양조장, 성냥공장, 비누공장 등 정말 다양한 생필품 기업을 운영한 재벌 사업가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농산물과 가축을 소련군에 납품한 대러시아 무역업자이기도 했죠.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무기 구입 루트를 파악했고, 충분한 재정과 외교력 덕분에 대량의 신식 무기 구입이 가능했던 겁니다."

실제로 봉오동 전투 직전에 기록된 일제 외무성 문서를 보면 '독립군이 봉오동에서 미싱 8대로 군복을 만들고 있다, 1000명이 넘게 산에서 기숙하며 세력을 과시한다'는 구절이 있다. 당시 봉오동 전투에 참전했던 만주 독립군의 실상이 우리의 상상과는 달랐음을 짐작케하는 구절이다.

같은 사람이 두 번 서훈?

그러나 학계에서는 오랜 시간 '봉오동=홍범도, 청산리=김좌진'이라는 공식이 통용되면서, 최운산은 학계와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최씨 가족은 1970년대부터 할아버지 최운산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위해 힘썼다. 발로 뛰어 사료들을 찾아내며 그를 토대로 서훈 신청서와 진정서를 내는 등의 갖은 노력 끝에, 마침내 1977년 최운산에게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이후 1990년 애족장(5등급)으로 격상됐다.

그런데 황당한 일은 한참 뒤인 2008년에 일어났다. 당시 국가보훈처가 '최문무'라는 인물에 대해 애국장(4등급)을 수여하며 독립유공자로 서훈한 것이다. 중국 옌벤(延邊)에 살고 있는 후손까지 확인했다고 한다.

한 방송사에서는 서울에 사는 최문무의 후손을 찾아갔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모른다", "나는 국가보훈처와 역사학자가 인정한 사람이다"라고만 할 뿐이었다고 한다.

최씨는 "최운산은 명길(明吉), 문무(文武), 만익(萬益), 풍(豊), 빈(斌), 고려(高麗), 복(福) 등 여러 이명(異名)을 갖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며 "최문무는 최운산의 다른 이름일 뿐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국가보훈처의 판단

그렇다면 보훈처가 최운산과 최문무가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최씨는 "보훈처는 최문무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을 때 본인을 최문무라고 진술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며 "체포되었을 때 자신의 본명을 곧이곧대로 진술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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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최씨는 맏형이었던 최진동에게 제기된 친일 의혹 때문에 동생인 최운산에 대해서도 학계가 연구를 쉬쉬하는 풍토를 지적했다. 최씨는 최진동 친일 의혹에 대해서도 반론을 펼쳤다.

"중국 옌벤의 작가 뤼우란싼(柳燃山)이 만들어낸 소설일 뿐입니다. 그가 쓴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라는 책에서 최진동에 대한 친일 의혹이 등장해요. 그러나 해당 의혹에 대해 학계에서 사실로 입증한 것도 없을 뿐더러, 옌벤역사학회에서는 오히려 최진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최진동에게 제기된 친일의혹의 대표적인 근거는 일제에 '국방헌금' 100원을 헌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씨는 "당시 일제에 의해 감시와 탄압을 받았던 남편 최진동을 걱정한 부인이 남편 몰래 헌금을 한 것"이라며 "당시에 최진동 역시 이 사실을 알고는 아내를 멀리 하려고 했을 정도로 집안이 난리가 났었다고 들었다"며 가족들에게 들은 기억을 회고했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 우리의 과제

올해는 봉오동 전투 100주년이다. 국권 피탈 이후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 정예부대를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전투의 기념일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앞두고 카자흐스탄에 잠든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국내 봉환한다는 깜짝 뉴스를 발표했다. 그러나 우리가 봉오동 전투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방법은, 한 사람의 영웅 신화를 포장하는 것보다 전투에 참전했던 이름 없는 독립군 한 명 한 명을 기억하는 것이다.

"각자가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은 나라가 망했을 때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가졌습니다. 많은 선택지 중에 '역사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꼭 보겠다, 내가 이만큼은 하고 가야겠다!'라는 선택지를 골랐던 겁니다. 저는 그것을 시민의식 또는 주인의식이나 주체의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할아버지가 남긴 숙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대한 최씨의 답이다.


◎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강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