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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금강일보] 상하이 훙커우공원 : 작은 정원 속 애국청년 윤봉길의 위대한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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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4-08 11:19 조회6,70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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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상하이 여행에서 상해임시정부와 훙커우공원(虹口公園)은 필수코스이다. 4월 11일은 상해임시정부 수립일이고,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일이다.

상해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였던 난징으로 신천지 부근에 있고, 훙커우공원은 와이탄(外灘) 북쪽 끝에 있다, 황푸강의 와이탄 제방길을 따라가도 훙커우공원으로 갈 수 있지만, 시내에서는 지하철 3 ·8호선 훙커우축구장역(虹口足球?)에서 내린 뒤 2번 출구로 나와서 직진하면 된다. 훙커우 축구장 안에 훙커우공원이 있는데, 상하이시에서는 1956년 그가 10여 년 동안 상하이에서 살았던 것을 기리며 공원 안에 루쉰(魯迅: 1881~1936)의 묘를 이장하고 루쉰 기념관을 짓더니, 1989년에는 공원 이름까지 루쉰 공원(魯迅公園)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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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성(浙江省) 출신인 루쉰은 귀족과 사대부의 전유물인 중국 문학을 비판하고 읽기 쉬운 문어체 소설인 백화문학(白話文學)을 개척한 대표적인 현대 문학가이자 사상가인데, 마오쩌둥은 그를 "위대한 사상가요, 혁명가요, 중국 문학의 아버지이다"라고 표현했다. 루쉰은 소설 아Q정전(阿Q正傳), 광인일기(狂人日記) 등을 남겼다.

울창한 나무와 숲, 호수가 있는 훙커우공원은 다른 공원들처럼 매일 아침 시민들이 태극권, 디스코 등 운동을 하는 시민공원이어서 입장료가 없다. 다만, 공원 안의 루쉰기념관과 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입장료를 내야 한다. 루쉰공원에는 루쉰의 동상도 세우고, 기념관 건물도 매우 깨끗하고 고급스럽다. 입장료 8위엔(한화 약 1200원)을 내고 들어서면, 팸플릿은 영문과 일본어만 있지만, 한글 안내문은 없다. 루쉰의 생애와 작품을 이해하는 데 아주 훌륭한 자료와 전시를 해놓고 있다.

루쉰 공원의 가장 북쪽에 공원 안의 작은 정원인 매원(梅園)이 있다. 입구에서 입장권 15위안(한화 약 2500원)을 내고 들어가면 윤봉길 의사 기념관 영역이다. 2003년 12월 윤봉길 의사 종친회가 개관한 2층 목조건물 매정(梅亭)은 루쉰 기념관과 비교하면 너무 낡고 초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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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은 윤봉길 의사의 출생부터 훙커우 공원 의거 전후의 사적을 보여주는 유품과 사진, 임시정부의 활동자료 등의 전시실이다. 한 손에는 폭탄, 한 손에는 권총을 든 윤봉길 의사 사진이 있고, 그 옆에 윤봉길과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도 있다. 또, 윤봉길 의사가 의거 후 자살하려고 소지했던 도시락 폭탄 복제품도 있다. 2층은 영상실인데, 한쪽에는 어머니가 감옥에 갇힌 아들 윤봉길에게 보낸 편지 일부가 목판에 새겨 있다.

아편전쟁 후 1842년 난징조약으로 홍콩, 마카오가 할양되고, 상하이는 광둥,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샤먼(廈門)과 함께 개항돼 외국인들은 물론 중국인들도 상하이로 많이 밀려왔다. 1919년 3·1운동 한 달 뒤인 4월 11일, 애국지사들이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는데, 오늘날 세계 제8위의 대도시 상하이는 베이징· 톈진 등과 함께 3대 직할시가 되었다. 영국과 포르투갈에 빼앗겼던 홍콩과 마카오는 155년만인 1997년 7월 반환된 후 50년 동안 자본주의 체제를 갖는 일국양제(一國兩制)의 특별행정구가 되었다.(자세히는 1월 8일 자 '중국의 개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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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들은 국내외 독립단체들의 통합에 나서는 한편 독립자금을 모집했지만, 사정은 매우 열악했다.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무장 투쟁이 불가능하자, 1931년 소규모 결사대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이때 서울 출신 애국청년 이봉창(李奉昌: 1900~1932)이 찾아와서 제1호 애국단원이 되었다. 김구 주석은 그에게 일본인들이 신으로 추앙하는 일왕의 폭살을 지시하니, 이봉창은 그해 12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2년 1월 8일 도쿄 사쿠라다몬(櫻田門) 앞에서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했다. 그렇지만, 일제가 신격화하던 일왕을 겨냥하고, 또 일본 경시청 앞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일본에 준 충격은 매우 컸다. 이봉창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10월 10일 사형 당했다.

한편 1931년 9월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1월 28일 상하이에서 조계를 경비하던 일본해군 육전대와 중국의 십구로군(十九路軍) 간에 벌어진 제1차 상해사변에서 패한 직후 상하이는 매우 어수선했다. 이때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과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안고 26살 난 충청도 예산 출신의 애국청년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이 1930년 3월 고향을 떠난 지 1년 만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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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상하이에서 1년여 동안 중국인의 세탁소에서 일하며 망명 노자 빚을 갚는 한편, 김구 주석에게 조국을 위해 희생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1932년 4월 29일, 일본이 상하이의 자국 조계지인 훙커우 공원에서 상하이사변 전승 기념식과 일왕 생신인 천장절(天長節)을 대대적으로 거행한다는 신문 보도가 나왔다. 김구 주석은 윤봉길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 윤봉길의 개인행동이 아닌 임시정부가 주도한 의거임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윤봉길의 한인애국단 가입식과 윤봉길의 서약서를 받았다. 윤봉길은 4월 27일과 28일 두 차례나 훙커우공원을 사전 답사하였으며, 김홍일 장군은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폭탄을 만들어 주었다. 물통은 투척용이고 도시락 폭탄은 체포되기 전에 자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거 당일 김구 주석과 조반을 함께 한 윤봉길은 자신의 시계와 김구 주석의 낡은 시계를 바꾸어 찬 뒤, 일본군의 경비가 삼엄한 훙커우 공원에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폭탄을 메고 들어갔다. 그리고 경축 행사가 진행 중인 행사장 무대에 폭탄을 던지자,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일본군 상하이 파견대장 시라카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이 즉사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중공사 시게미쓰, 총영사 무라이 등은 중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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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은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1월 18일 일본 오사카형무소로 이송되어 그해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장제스 국민당 총통은 만주사변과 상해사변 패전으로 기가 죽어 있다가 윤봉길의 의거에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으니, 참으로 대단하다"고 감탄하면서 황포군관학교에 독립군 장교 양성을 받아들이는 등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의 항일투쟁에 활기를 주었지만, 일본의 무자비한 보복이 강화되어 안창호가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의 배후인 김구 주석은 20만 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수배되었다. 결국, 상해 임시정부는 상해에서 멀리 항저우(杭州)로 옮겨가게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청사나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대한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많이 아쉽다.(3월 4일 자 '상해임시정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