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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연합뉴스]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김성숙·두쥔후이 사랑과 韓·中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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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4-06 09:44 조회6,48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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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만들 때 이름에 공산주의란 말을 넣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보다 조국 해방이 더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나라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단정하고 무시했어요. 나와 내 동지들은 '민족 문제가 더 크다. 민족이 독립된 뒤에야 공산주의고 사회주의고 뭐든지 되지 민족의 독립 없이 무엇이 되느냐. 우리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전 민족이 단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민족주의다'라고 역설했지요"

승려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혁신계 민주화운동가이던 김성숙이 1936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박건웅·김산(장지락) 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할 때의 심경을 훗날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좌파 독립운동가 4명의 면담록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에 실린 이 증언에서 보듯이 그는 탁월한 공산주의 이론가로 꼽혔으면서도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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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본명은 김성암(金星巖)이다. 성숙(星淑)은 승려가 되면서 얻은 법명이고 법호는 태허(太虛)다. 운암(雲岩)이란 호도 즐겨 썼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뒤 1908년 신식학교인 대한독립학교에 입학했으나 1910년 한일합병 후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자 그만뒀다.

1916년 봄 만주의 신흥학교에 들어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일본군의 경비가 삼엄해 국경을 넘는 데 실패했다. 집에 돌아갈 수도 없어 고민에 빠져 있던 중 함경남도 원산 서강사에서 신원 스님을 만나 출가를 결심했다.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남양주 봉선사에서 월초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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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숙은 불교뿐만 아니라 철학과 사회과학 서적을 두루 읽는 한편 월초 스님과 가깝던 손병희·한용운·김법린 등과 교류했다. 1919년 3·1운동의 불길이 타오르자 경기도 양주와 포천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7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불교 개혁운동과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23년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北京) 민국대(民國大)에 들어간 뒤 한국인 최초의 공산주의 잡지 '혁명', 베이징불교유학생회 기관지 '황야', 고려유학생회 기관지 '해외순보' 등의 발간을 주도하며 필명을 날리고 의열단에도 가입했다. 일제의 감시망이 좁혀오자 1925년 활동무대를 광저우(廣州)로 옮겼다. 이듬해 중산대(中山大)에 입학해 김원봉·김산 등과 유월한국혁명동지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운동' 주필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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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대에서 김성숙은 중국인 여학생 두쥔후이(杜君慧)와 운명적 사랑에 빠졌다. 한국에 부인과 1남 1녀를 둔 상태였으나 1929년 상하이에서 결혼했다. 1938년 김원봉 등과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1940년 충칭(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임정은 김구 등 우파가 주도하고 있었으나 조국 해방을 위해서는 민족 단결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선전위원, 외교위원, 내무차장을 거쳐 국무위원에 뽑혔고 한중문화협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아내이자 동지인 두쥔후이는 중국인이면서도 남편과 함께 대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30년 중국창작비평회에 함께 가입해 필봉을 휘두르고 1935년 상하이문화계구국운동선언에도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김성숙은 두쥔후이가 이끌던 상하이여성구국회에도 동참했다. 김성숙이 1943년 1월 임정 국무회의에서 외교위원으로 뽑힌 직후 두쥔후이도 외무부 부원으로 선임됐다. 1945년 3월 15일 열린 한국구제총회에서는 각각 감사와 이사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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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김성숙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임정과 민족의 앞길은 먹구름 같은 외세에 가로막혀 캄캄하게 됐다"고 우려했다. 1945년 12월 1일 두쥔후이와 세 아들을 중국에 남겨둔 채 미군 수송기를 타고 모국으로 향했다.

환국 후 여운형·김규식과 좌우 합작운동을 벌였으나 북한 정권에 실망해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불참했다. 6·25 때는 미처 피란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다가 남로당 간부의 협조 요청을 거절했다. 이후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반독재 투쟁을 펼치며 두 차례 수감되는 등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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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후 사회대중당에 참가해 정치활동을 재개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투옥됐다.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장해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혐의였다. 1965년부터 통일사회당·신한당·신민당 등에 몸담고 반독재 노선을 걷다가 1969년 4월 12일 7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장례식은 서울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경기도 파주에 묻혔다가 2004년 국립서울현충원 임정 묘역으로 이장했다.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했다. 두쥔후이는 2016년 애족장(5등급)을 받았다. 내외국인 부부가 함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1964년 독립유공자 표창 소식을 듣고 김성숙은 "우리나라가 아직도 독립되지 못하고 외국 세력 하에서 신음하고 있으므로 독립운동을 계속해야 한다. 아직은 논공행상할 때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는 지하에서도 그 생각이 변함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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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생이별한 중국의 세 아들은 어머니 성을 따라 이름을 호적에 올렸다. 첫째 두간(杜甘)은 광둥(廣東)성교향악단 지휘자로 이름을 날린 음악가다. 줄리아드음악원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두닝우(杜寧武)가 그의 아들이다. 둘째 두젠(杜健)은 화가이자 베이징중앙미술대 교수이고, 셋째 두롄(杜連)은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고문을 맡고 있다. 김성숙은 첫 부인 정씨 사이에 김정봉·김숙녀를 낳았다.

외손자 민성진 씨가 회장을 맡은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는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과 함께 김성숙의 51주기 추모제를 기일인 12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 예정이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우려해 5월 12일로 미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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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업회는 둘의 사랑이 싹튼 중국 중산대에 김성숙·두쥔후이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2007년 중산대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데 이어 2018년 12월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대지 제공과 설계·시공은 중산대가 맡고 건립 기금은 기념사업회가 광저우총영사관·국가보훈처와 협의해 지원하기로 했다.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에 따른 한한령(韓限令·중국 내 한류 금지령)과 코로나19 확산을 둘러싼 논란으로 얼어붙은 한중관계가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국적을 뛰어넘은 김성숙과 두쥔후이의 애틋한 사랑과 숭고한 희생이 널리 알려진다면 한국인과 중국인의 우정도 깊어지지 않을까 싶다.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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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이희용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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