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공포의 계절을 견디고 신록의 5월 산하를 맞으려니 새삼 감사할 분들이 많음을 실감한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의 이 ‘값진 일상’은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 보다 가족과 이웃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고 배려한 ‘우리’라는 공동체에서 비롯되었음을 백년전 경기 양주군을 뜨겁게 산 선열들을 보며 배울 수 있다.
101년 전 양주군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3일 미금면 평내리에서 시작되었다. 100여 명의 주민들이 조선총독부의 고유문을 야유하며 만세를 부른 데 이어 다음날 150여 명이 금곡리 면사무소로 가는 길에서 시위를 벌였다.
3월 14일 와부면 송촌리와 조안리 주민 500여 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면사무소가 있는 덕소리까지 진출했을 때 일본 경찰들에 의해 주도자 3명이 체포되었다. 시위 군중은 체포된 인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총칼로 압박하는 일본 경찰에 곤봉으로 맞서면서 헌병주재소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헌병들이 발포와 함께 총칼로 40명을 체포하였다.
화도면에서는 3월 16일 월산리·답내리 주민 200여 명이 밤늦게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일본 경찰들이 출동해 주민 3명을 마석우리 헌병주재소로 연행해 갔다. 이에 반발한 주민들이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자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일본 헌병은 무차별 발포를 하여 이달용 등 4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이제혁 등 7명이 중상을 입었다. 체포된 이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로 인해 김필규 등은 옥중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3월 24일 진접면 금곡리에서는 청년 13명이 태극기를 제작해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29일 시위에 나서 400여 명이 참여하였고, 긴장한 일본 헌병들이 발포하여 1명이 사상하고 3명이 부상당했다. 3월 26일 이담면 동두천 시장의 장날을 맞아 배재학당 학생들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해 만세운동을 진행했다.
이날 동두천 시장에는 10개 마을주민 1,300여 명이 집결하였다. 시위대는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에게 선언서를 서명케 하며 동두천역까지 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자체병력으로 제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일본경찰은 주내면의 본대에 증원병을 요청해 기마대가 출동, 주도자 7명을 체포하였다.
3월 27일 백석면 연곡리에서는 구장 안종규와 그의 형이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주민 600여 명과 함께 백석면사무소까지 만세시위를 벌였다. 구리면 상봉리에서도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19명이 체포되었고, 토평리와 교내리 그리고 아천리의 아차산 꼭대기까지 올라가 만세시위를 벌였다.
28일에는 광적면 면사무소가 있는 가납리에서 350여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자 추교시장에 재집결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일본 헌병이 총기를 발포하자, 돌팔매질을 하며 저항하다 3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행하였다.
이날의 만세운동과 희생자들을 기려 후손들과 지역주민들이 2008년 가납리 732일대 공원에 ‘양주 가래비3·1운동 순국기념비’가 조성되어 매년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장흥면 면사무소가 자리한 교현리에서도 3월 28일 밤부터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다음날 아침부터 300여 명이 면사무소로 향하며 만세를 불렀다.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총기로 위협하자, 시위대는 총기를 빼앗는 등 적극 저항하였고 경찰 발포로 1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29일 별내면 퇴계원리에서도 200여 명이 시위를 벌여 5명이 체포되었고, 노해면 창동리 부근에서도 500여 명이 시위를 벌여 93명이 체포되었다. 3월 30일 주내면에서도 60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를 공격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별내면의 19세의 한 청년은 "한국을 강탈한 나머지 태황제(고종) 폐하를 독살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이가 갈림을 참을 수 없다...나도 한 자루의 칼을 품었으니 한 번 죽음으로써 원한을 씻을 날이 있을 것이다."는 내용을 담은 ‘일본천황에게 보내는 편지’를 일본 궁내성으로 보냈다. 이 사건으로 일제는 청년에게 징역 3년이라는 중형을 내렸다.
이러한 격렬한 항일정서 속에서 양주군에서는 승려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한 특이한 양상을 보인다. 조선 초기 세조를 안치한 광릉의 능침사로 조성된 진접면 봉선사의 승려인 이순재(지월스님)와 김성숙·강완수 등은 ‘조선독립단 임시사무’ 명의로 만세시위의 동참을 촉구하는 유인물을 인쇄해 인근 마을에 배포하였다. 이에 3월 31일 광릉천변에 6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고 광주시장으로 진출하였다. 일제 경찰이 출동해 시위주도자 8명을 비롯해 3명의 승려를 체포하고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1년 2개월의 옥고를 치른 김성숙(金星淑, 1898~1969)은 일제의 탄압에 위축되기보다는 더욱 단단해졌다. 1922년 승려의 신분으로 조선무산자동맹과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한 그는 승려 5명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북경 민국대학에 입학,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이어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일한 그를 눈여겨 본 신채호는 의열단 단원으로 추천하였다.
1925년 북경 정부의 추방을 받고 광동의 중산대학으로 옮긴 그는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27년 인민봉기에 참가하였다. 이어 상해로 돌아와 중국 문화총동맹과 작가연맹 등에 가담해 신문화운동과 반제동맹 간부로 활동하면서 항일전쟁에도 가담하였다.
1937년 일본의 중국침략이 본격화되자, 김성숙은 동지 김원봉·류자명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과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지도위원이 되었다. 조선의용대가 1942년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들어가 국무위원으로 취임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환국하였고, 여운형과 같이 좌우합작을 지지하며 근로인민당을 창당해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창당 2개월 만에 당수인 여운형이 피살되고, 남북협상을 전후해 동지들이 월북하자 사퇴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신하였으나,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부역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 혁신계 인사들이 통일사회당을 창당하자 정치위원으로 재기하였으나,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10개월간 옥고를 치러야했다. 1966년 재야통합야당인 신민당 창당에 참여해 지도위원이 되었지만, 1969년 4월 숨을 거두었으니 실로 항일과 민주혁신으로 일관한 삶이라 하겠다.
때마침 오는 12일 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서 51주기 추모제와 평전 봉정식도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의로운 승려들을 배출한 봉선사의 입구에 친일 반민족행위 문학가인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어 보는 이의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해방 후 친일파로 몰린 그가 피신하며 절 담 옆집에서 은거한 일로 운허스님이 배려해 주었다는데, 평생 항일과 독재에 맞서 싸운 독립지사들을 기리는 안내판이나 기념비가 우선이지 않을까.
글·사진 김명섭(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