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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중부일보] 조소앙 가문에 빚진 대한민국, 7남매 2대가 걸친 독립운동… 정의·균등·통일한국 정신 오늘날 되새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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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6-05 09:36 조회7,57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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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남면 양연로 1173번지 87길. 봉암저수지와 원당저수지가 있는 황방마을 조소앙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함양조씨 대대로 살던 마을이며, 소앙 선생을 비롯해 7남매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2016년 복원된 이후 수초와 연꽃을 볼 수 있는 생태연못과 잔디공원, 야산과 저수지가 어우러진 이곳에서 자란 7남매 중 5형제가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기여한 공로로 독립유공자 수훈을 받았다. 


나아가 조소앙의 두 부인(오영선·최형록)과 자녀, 조카까지 합해 총 14명이 포상을 받은, 그야말로 독립운동의 명문가문이 아닐 수 없다.

조소앙 가문이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키는데 어떠한 피땀을 흘렸을까. 장남 조용하(1882~1937)는 대한제국 시절 독일주대 한국공사관 서기관을 지낸 후 죽산(현 안성)과 이천에서 군수를 역임했다. 


1916년 미국 하와이로 망명해 박용만과 함께 대조선독립단 총단장을 맡아 이역만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차남 조소앙(본명 용은)은 1887년 경기도 파주군 월롱면 태생으로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후 17세에 성균관을 수료한 후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12년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하기까지 유학 8년 동안 쓴 그의 일기에는 법철학과 행정법·국제공법을 비롯해 민주주의론 등 신사상에 대한 독서편력은 물론 국제정세의 변화가 상세히 적혀있다.

그후 동생 용주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신아동제사를 만든 후 1917년 상해지역 독립운동자들과 함께 대동단결을 통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촉구하는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했다. 


이어 만주 길림성에서 여준·김교헌·김동삼 등이 결성한 대한독립의군부에서 1919년 2월 유명한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해 39명 공동명의로 발표하였다. 


선언문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융희황제가 주권을 포기했으니 이를 국민들이 계승·상속해야 한다는 국민주권론을 주창하였다. 


나아가 독립국가 건설의 방향은 정치평등과 경제·교육·사회의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고, 대외적으로 민족평등과 국가평등을 실현해 사해인류에 기여한다고 제시하였다.

3·1운동 직후 상해로 온 조소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는 일에 참여해 임시의정원의 조직과 임시헌장,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유럽의 스위스로 건너가 36개국 대표가 모인 국제사회당대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국제연맹에 가입하도록 했다. 


임시정부로 돌아와 외무총장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그는 1930년 안창호·김구와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해 외교업무를 전담했다. 


이곳에서 조소앙은 당이 지향하는 당의와 당강을 만들어 정치균등·경제균등·교육균등을 지향하는 삼균주의를 표방하였다.

1934년 임시정부의 내무장, 한국독립당의 총무장 등을 지내면서 기관지 ‘진광’ 간행을 주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원봉과 의열단 단원들이 만든 민족혁명당에 참여해 당의·당강·정책기초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러나 민족혁명당과의 노선 차이를 이유로 탈당해 우의단체로 규정하고 한국독립당을 재건, 그 지도이념으로 ‘삼균주의’를 채택하였다.


 임시정부의 외무부장 겸 선전위원회 위원에 선임된 조소앙은 ‘독립운동방략’을 저술해 향후 건립될 대한민국의 기본계획과 방향을 설계하였다. 


1940년 5월 중경에서 통합된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자 그의 당의와 당강을 기초한 조소앙은 9월 17일 조직된 한국광복군의 임무규정에도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신민주국가를 건설할 무력적 기간이 됨"이라 하여 삼균주의를 기본정신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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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은 그해 11월 유명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건국강령은 총강·복국·건국의 3장과 24개항으로 구성되었는데, 독립 후 건설할 국가의 정체를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였다. 


향후 대한민국은 토지와 대생산기구의 국유화, 고등교육의 국가전담, 극빈계급의 생활정도와 문화수준 올리기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한 일제에 부화한 자, 독립운동과 건국강령을 반대한 이른바 반민족행위자의 선거·피선거권을 박탈하도록 규정했다. 


민족정기와 자치능력을 갖춘 국민으로 육성하려는 교육정책을 위해서는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을 실시해야 하며 국민도덕·생활지능·자치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제시했다. 


건국강령이 해방 후 제대로 시행되었어도 훨씬 정의롭고 부강하며, 평등한 대한민국이 되었을 것이다. 


1944년 4월에 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 제정에도 그는 큰 역할을 담당했다.

조소앙이 대한민국의 기틀을 만드는 와중에 형제들과 부인·조카들도 물심양면 도왔다. 


3남 조용주(1891~1937)는 1913년 중국 상해로 망명해 아세아민족반일대동단을 결성한 후 국내로 돌아와 안재홍 등과 함께 비밀결사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해 임정 재정지원을 맡았다. 


4남 조용한(1894~1935) 역시 임시정부에 참여해 독립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밀입국했다가 붙잡혀 3년의 옥고를 치루었지만 다시 망명해 형님 소앙을 돕다가 병사했다. 


다섯째이자 장녀인 조용제(1898~1948) 역시 상해로 망명해 1945년까지 한국혁명여성동맹과 애국부인회 활동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막내인 6남 조시원(1904~1982)은 상해 한인청년동맹을 거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한국독립당 활동을 펼쳤으며, 광복군 창설에 참여해 법무실장과 정훈처장으로 활약했다. 


그의 부인 이순승도 한국혁명여성동맹과 애국부인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다. 조소앙의 장남 조시제(1913~1947)는 상해에서 한인청년당을 조직한 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만들어 선무공작을 펴고 광복군 창설대원으로 활약했다. 


이어 차남인 조인제(1918~1997) 역시 서안의 광복군 총사령부에 참여해 부관에 이어 참모중령 인사과장과 제1지대 간부로 활약했다. 


막내동생 조시원-이순승의 장녀인 조순옥(1923~1973)도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총사령부의 총무처에서 항일활동에 참여했다. 


그녀의 남편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춘생(1912~2011)으로 역시 광복군 총사령부와 제2지대 구대장으로 활약했다.

조소앙과 가족 일행은 1945년 12월 개인자격으로 환국했지만, 곧 외세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서야 했다. 


또 1948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도 막으려 김구 주석과 함께 평양으로 가 남북협상에 참가하였지만, 소득을 얻지 못했다. 


이에 삼균주의를 실행할 사회당을 조직해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하기로 한 조소앙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전국 최고 득점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곧 6·25전쟁이 터져 납북되고 말았다. 북한에서 중립화통일운동을 벌이다 사망해 평양 애국지사 묘역에 묻히고, 고향땅 기념관 뒷산에는 가묘가 세워졌다.


7남매가 2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나섰을 뿐아니라 가난 없이 정의롭고 균등한 통일한국의 대들보를 만든 조소앙과 그의 가문에게 대한민국은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188석 범여권’을 자랑하는 여당과 ‘진취적 정당’으로 탈바꿈을 하려는 야당에게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다시 새겨보길 강권하고 싶다.

글·사진 김명섭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