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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중부일보]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여운형과 신익희… 애달픈 독립운동가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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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7-02 09:56 조회7,53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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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바쳐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결코 순탄치가 않았다.

특히 생애를 마감하는 순간은 더욱더 그러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몽양 여운형(1886∼1947)과 해공 신익희(1894∼1956)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여운형은 1947년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파 한지근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했으며,
신익희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 중에 1956년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하게 된다.

몽양은 61세, 해공은 62세 때다.

"어느 집 새벽닭이 울면 이웃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닭 하나하나가 다 울 때를 기다렸다 때가
되어 우는 것이지 남이 운다고 따라 우는 게 아닙니다.

이처럼 조선의 독립운동 또한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으로 발작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
결코 민족자결주의 같은 것에 도취되어 일어난 게 아니올시다.

이제 조선민족의 열화 같은 애국심이 폭발했습니다. 붉은 피와 생명으로써 조국 독립에
이바지하겠다는 것을 과연 누가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 열도의 간담을 서늘케 한 당대의 웅변가 여운형의 사자후는 그를 초청한 하라(原敬)
내각의 사퇴를 불러올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24e324396ea4f93729eff27c72802ff9_1593651215_37.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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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의 묘골이라는 곳에서 출생하였다.

여운형은 자서전에서 동학에 가담했으며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졌던 할아버지의 사상적
감화를 받으면서 자라났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는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친척의 도움으로 서울로 가서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를 거쳐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에서 수학하였다.

1906년 부친이 사망하자 집안의 노비를 모두 불러모아 노비 문서를 모두 불태워 그들을
해방시켰다.

이후 여운형의 삶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하였다.

국채보상운동, 계몽운동, 청년교육, 2·8독립선언과 3·1운동, 신한청년당 활동, 상해임시정부
활동 등을 통해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에는 고려공산당과 중국국민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30년대에는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을 맡았었는데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사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1940년대에는 조선건국동맹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등을 조직해 활동하였고, 조선체육회
회장과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 조선인민당 당수와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 및
근로인민당 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로 활동하였던 여운형의 삶과 정신 및 사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2011년에는 생가를 복원하여 기념관과 함께 개관하였고 이는 다음 해에
국가보훈처에 의해 현충 시설로 지정되었다.

지상 1층은 복원된 여운형의 생가이며, 지하 1층은 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1715년에 지어졌던 생가는 여운형이 출생한 곳으로 1908년까지 살았으며, 해방 전후에도
종종 내려와서 지낸 장소이다.

기념관은 여운형의 유품 및 관련 자료 250점 이상을 소장하고 있다.

"나라는 반드시 완전하게 독립되어야 하고, 민족은 반드시 철저하게 해방되어야 하며,
사회는 반드시 평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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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광복을 앞둔 1945년 신익희 선생이 중국에서 쓴 글이다.

신익희 선생은 1894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학을 익혔으며 특히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1908년에 상경하여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였다.

일제로부터 국권을 되찾고 민족적 수모를 설욕하는 방법은 서구의 진보한 문명을 수용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임을 깨닫고 영어과를 택하였다.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해에 조국은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고 말았는데, 이 같은
망국의 상황에 당면하여 신익희는 역설적으로 일본을 이겨야 한다는 심정으로 일본 유학을
꿈꾸게 된다.

그리하여 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 경제학부에 입학한 선생은 독립운동에 전위가 될
유학생들을 결속시키는 데 주력하게 된다.

그리고 기관지로 발행된 ‘학지광’을 통하여 유학생과 국내 청년 학생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특히 1913년에는 동지들과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나누어 마시면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고 한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서는 중동학교와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만주·북경·상해 등지를 드나들면서 해외 독립운동원과의 연락을 맡아보고, 안으로는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토의하여 3·1운동의 도화선을 당기는 데 일역을
담당하였다.

만세 시위에 가담했던 신익희는 1919년 3월 다시 상해로 떠나 그로부터 26년간의 망명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상해에서 일본유학생친목단체인 유일학회친목회를 조직하기도 했으며, 대한민국임시
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을 지냈으며, 그 뒤 내무총장·
법무총장·문교부장·외무부장 등을 두루 맡았고 국무원 비서실장과 의정원 부의장을
겸임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에 몸담기 시작하면서부터, 독립운동이 처음에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시작되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군사행동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임시정부에 있으면서도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한국청년들에 의한 군대조직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당시 상승기에 있던 중국혁명군과 연결하여 한중합작에 의한 군사행동의
실현을 추진해 보기도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신익희는 광복과 더불어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내무부장 자격으로 환국하였으며,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교 초대학장 등을
겸하다가 그 해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피선되고 1947년에는 의장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가 다시 의장에 피선되었으며,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다시 국회의장에 피선되고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발전시켜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하여 자유당의 이승만과 맞서 호남지방으로 유세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현재 신익희 선생의 동상은 남한산성과 천호동 등 여러 곳에 세워져 선생의 업적과 사상을
널리 알리고 있다. 오래전부터 선생의 기념관 건립을 추진한다는 이야기는 많았지만
아직까지도 착공되었다는 소식이 없어 아쉽다.

글=김기영 위례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