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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중부일보] 봉오동·청산리 승첩 뒤 용인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동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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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6-25 10:50 조회8,36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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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확산과 북한의 남북연락사무소 파괴로 인해 어느 때보다 힘겨운 6월이다.
건강과 안보의 동시 위기상황을 겪으며 70년 전 한국전쟁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하지만,
올해가 민초들에 의해 조직된 독립군들이 일본군대를 물리친 봉오동·청산리대첩을 이룬지
꼭 100년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00년 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무원 포고문 1호로 ‘독립전쟁의 원년’을 선포하고,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해 생도 43명을 만주로 파견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용단이 아닐 수 없다.

당대 세계 최강의 일본 정규군대를 상대로 최대의 승전을 이룬 비결은 몇몇 독립군의
영웅적 희생만이 아니라 정부의 현명한 방침과 신흥무관학교가 10년간 쌓은 3천여
군사전력, 체코군의 무기 지원과 독립군 부대의 연합작전, 특히 이름 없는 동포들의 헌신
등이 모여져 이룬 피땀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큰 감동을 준다.

1920년 6월 7일 새벽부터 시작된 중국 길림성 화룡현 봉오동 골짜기에서의 격전과 10월 21일
부터 6일간 청산리 일대에서 치러진 10차례 전투의 현장에 경기도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군사지휘관과 중대장으로 참여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이로 김혁 장군과
여준 선생, 오광선 장군을 들 수 있다.

용인 기흥구 갈천(현 신갈동) 유지 출신인 김혁(金爀, 1875~1936)은 어린 시절 용인향교에서
당대 유림의 거목인 동전 맹보순으로부터 유학과 신학문을 배운다.

스승 맹보순은 1910년 국치를 맞아 제자 이영선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안동현(현 단동시)에서
성신태 상점을 열어 신흥무관학교에 자금과 학생들을 보내주는 비밀활동을 펼쳤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졸업생이며 육군참위로 경성시위보병대에 근무한 제자 김혁도 만주 일대를
사전 탐방한 후 돌아와 1919년 3월 30일 기흥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서 참여한 후 다시 만주
유하현으로 망명하였다.

김혁은 백두산 서남쪽인 무송현 하북에서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 단체인 흥업단에 가입하여
부단장으로 활동하다가 1920년 8월 대한군정서(후에 북로군정서)에서 군사양성 책임을 맡았다.

 이 곳에서 김혁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은 여준 선생과 교관으로 재직한 오광선과 재회한
것으로 보인다.

1920년 10월 21~26일 김혁이 이끈 대한군정서는 만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청산리대첩 이후 일제는 만주의 한인 동포들을 대상으로 보복 학살을 자행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고, 추격을 피해 러시아 자유시로 피신한 김혁과 이청천, 오광선 등 독립군 주력부대는
레닌정권의 이간질로 인해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참변을 겪어야 했다.

만주로 돌아온 김혁은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8개 단체가 만든 대한통의부 결성에 가담해
군사부감을 맡았다가 1924년 3월 북만주 동빈현에서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하였다.

이어 1925년 3월 대한독립군단 등 21개 단체를 규합해 신민부를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군사부 위원장에는 김좌진, 외교부위원장에 조성환 등이 맡았다.

신민부는 3권분립제로서 중앙집행위원회와 검사원, 참의원으로 나눠졌으니, 중국땅에 세운
한인 자치정부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독립군 양성을 하기 위해 성동(城東)사관학교를 설립해 김혁이 교장을 맡아 약 5백 명의
생도를 배출해 독립전쟁 최전선에 투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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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부가 북만주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자, 일제의 하얼빈 영사관 경찰들은 1928년 1월
중국 순경의 후원을 받아 신민부의 본부가 있는 석두하자역 근처의 고려인촌을 급습해 김혁
중앙집행위원장 등 중요간부 12명을 체포하였다. 마침 마을 순행을 나갔던 김좌진 군사부위원
장만 화를 면했다.

신의주로 압송되어 징역 10년형을 언도받은 김혁은 7년 간의 수형생활로 병환을 얻게 되었고,
1939년 4월 순국하고 말았다.

용인의 큰 스승이자 만주 무장투쟁의 지도자로 여준(呂準, 1862~1932)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용인 원삼면 죽릉리 태생인 그는 비밀결사 신민회 회원으로서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역사
와 지리를 가르치다가 고향땅에 삼악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시켰다.

1911년 일제에 의해 학교가 폐교되자 압록강을 건너 신흥무관학교에 합류해 영어와 군사 교육
을 가르쳤다.

1913년 이상룡의 뒤를 이어 교장에 취임하여 1917년까지 학교 일을 전담했으니 신흥학교의
산 증인이라 하겠다.

1922년 액목현에 검성중학교를 설립하고, 농업주식회사 생육사를 조직한 바 있는 여준은
1930년 북만주 민족운동을 주도할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70세를 바라보는 노년이었지만, 고문을 맡아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킨 길림성을 점령하게 되자, 쫓겨가야 했다.

퇴각하는 과정에 중국군에 의해 선생과 아들이 안타깝게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스승 여준에 의해 길러진 독립영웅으로 오광선(吳光鮮, 1896~1967)을 들 수 있다.

의병활동을 한 부친의 영향으로 오광선은 여준 선생이 세운 삼악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이회영의 세운 상동청년학원에서 수학했다.

이 곳도 일제에 의해 폐교되자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군사훈련을 받은 그는
1918년 졸업한 후 교관으로 근무했다.

1920년 그는 서로군정서(부독판 여준)의 제1대대 제1중대장과 3중대장(1920.10~1921.2)을
맡으며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어 제1대대장과 별동대장, 경비대장을 맡아 각종 전투에 참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1932년에는 한국독립당의 의용군 중대장으로서 독립군 3대 대첩으로 꼽히는
대전자령 전투을 비롯해 일면파 전투, 연수현 전투, 아성전투, 쌍성전투, 경박호전투,
동경성전투, 동녕현 전투를 치루었다.

1934년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지시에 따라 만주에서 중국 관내로 이동한 오광선은 낙양군관학
교 교관을 지내다가 다시 북경으로 가 비밀공작을 맡았다.

1936년 북경에서 금은방을 차리며 잠행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수감되었지만,
중국인 행세를 하며 가명을 써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출옥한 이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 빨치산들과 만나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맹보순과 김혁, 여준과 오광선 등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동행을 보면서 6월의 난국과 위협을
이겨낼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글·사진=김명섭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