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사에 찬란한 승리로 기록된 봉오동 전투가 이달로 100주년을 맞았다.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등이 이끈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를 격파한 봉오동 전투는
지난해 영화로도 제작돼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독립군이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연해주에
도착한 체코 군단과 제정 러시아 군인들이 갖고 있던 무기 덕분이었다.
일본군 무기와 유사한 성능을 지닌 체코 군단의 무기는 항일무장투쟁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는 계기가 됐다.
◆극동에서 이어진 한국과 체코의 인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였다.
오스트리아군 소속으로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와 싸우던 체코인들은 러시아에 투항,
오스트리아에 총부리를 겨눴다.
전쟁 전 러시아로 망명한 체코인들도 합류했다. 자신들이 거주하던 러시아에 대한
충성과 모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애국심이 합쳐진 결과였다.
이들이 모여 창설된 부대가 체코 군단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 직후 집권한 볼셰비키 정부는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프랑스 파리에 있던 체코 망명정부는 체코 군단 4만5000여 명을 프랑스군에
배속시켜 독일군과 싸우기로 했다.
하지만 독일을 가로질러 서부전선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해 내전 중인 러시아를 가로질러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열차 수백 량을 확보한 체코 군단은 병력과 무기, 식량을 싣고 동쪽으로 향했다.
병원과 은행에 우체국, 신문사까지 갖춘 체코 군단의 열차는 ‘움직이는 정부’나
다름없는 ‘설국열차’였다.
이때 발행된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신문에는 3.1 운동에 대한 기사도 포함됐다.
체코 군단은 1918년 6월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했으나 1차 대전이 끝나면서
귀국 준비에 들어갔다.
체코 군단의 마지막 병력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것은 1920년 9월.
이 과정에서 체코 군단 장병들은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 조직과 접촉한다.
일본군에 맞설 최신 무기가 필요했던 독립군과 귀국 여비를 마련하려는 체코 군단
장병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였다.
거래가 이뤄진 장소는 연해주의 깊은 숲속이었다.
독립군은 이곳에서 맥심기관총과 수류탄, 소총 등을 구입했다.
일본군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독립군은 여러 단계를 거쳐 무기를 소량 구매 후
은밀히 운반했다.
상해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체코 군단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체코 군단은 러시아 내전 당시 가장 강한 전투력을 갖춘 군대였다.
또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체코 군단과 우호 관계를 구축하면 한국의 독립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국제사회에 확산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실제로 여운형, 안창호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해에서 체코 군단
지도자를 만났고, 연해주 일대 독립운동단체도 접촉을 시도했다.
만주 일대에 밀정을 파견했던 조선총독부와 만주 주둔 일본군은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1920년 7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신(申)이라는 자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출현해 체코군 총기 5만정, 기관총과 수류탄 5000발을 소량씩 매입해 배와
중국마차로 비밀리에 보내고 있다”는 기밀문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하얼빈 주둔 일본군 간부가 현지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무관에게 “체코 군인들이
한국인들에게 총기를 1정 당 120루블에 팔고 있다”고 항의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같은 상황은 체코 군단에 상당한 부담이 됐다.
당시 일본군과 정부는 체코 군단을 지원하고 있었다.
체코 군단도 귀국을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독립군에 대한 무기 판매가 이뤄진 것은 금전적인 이해관계 외에도
같은 약소민족이라는 동병상련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군은 미국서 만든 러시아 소총을 썼다
독립군이 가장 많이 필요로 했던 무기는 소총이었다.
매복과 기습을 위해서는 신속한 이동이 필수다. 야포 등 중화기보다는 휴대가
용이한 소총이 더 필요한 이유다.
독립군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무기 제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기술적, 재정적 문제로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다양한 경로로 무기를
구매해 사용했다.
당시 독립군은 러시아산 모신나강 소총을 주로 썼다.
일본군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나 1차 대전 기간에 밀반입한 독일산 소총 등도
일부 사용했지만, 대량으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러시아혁명 직후 제정 러시아 군인들과 체코 군단 장병들이 무기를 대량으로
팔면서 민간 시장에서도 모신나강 소총을 쉽게 살 수 있었다.
이들이 판매한 모신나강 소총은 독립군에 유입됐다.
흥미로운 부분은 체코 군단이 갖고 있던 모신나강 소총 중 상당수가 미국에서
생산된 무기라는 점이다.
1차 대전 개전 당시 러시아는 98개 보병사단과 37개 기병사단을 독일 방면으로 보냈다.
이들에게 지급된 모신나강 소총은 150만정에 달했다.
하지만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15만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내면서 이와 동일한
규모의 소총도 사라졌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신병들에게 지급할 소총 수요도 폭증했다.
하지만 산업 기반이 미비해 군대에 지급할 모신나강 소총을 자체적으로 충당할
수 없었던 제정 러시아는 미국과 일본에 수백만정의 소총을 주문했다.
이때 생산된 소총 중 일부는 체코 군단에 지급됐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은 모신나강 소총 공급을 중단한다.
납품하지 못한 소총은 러시아혁명에 개입한 연합군과 체코 군단에 인도됐다.
체코 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면서 판매한 무기가 독립군의 손에 들어온 셈이다.
체코 군단이 팔았다고 해서 체코산 무기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미국에서 제작된
러시아 소총이다.
독립군은 이렇게 확보한 무기로 화력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 참가한 독립군의 사진이나 기록화에는 맥심 기관총과
모신나강 소총으로 추정되는 무기가 포착된다.
비록 미국에서 만들어진 모신나강 소총이 혹한의 시베리아 추위에 파손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무기를 자체 제작할 수 없었던 독립군에게는 귀중한 존재였다.
이같은 무기를 공급한 사람들이 항일 무장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의 숨은 조력자들이다.
◎ 세계일보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