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운동 주역 장재성 선생 심사대상조차 안돼 ...
해방 이전 행적만으로 서훈 줘야
"설령 100명의 사람들 중 99명이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99명이 한 사람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은 일인의 독재자가 99명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과 같다."
고교 시절 배운 존 스튜어트 밀의 금언이다. 오랜 세월 잊고 지냈던
밀의 금언을 새삼 떠올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나는 요즈음 대한민국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다. 대한민국은
항일 투사들의 피와 땀으로 건국되었음은 상식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상훈법에는 독립유공자를 예우하는 '독립훈장'이 없다.
놀라운 일이다. 새마을훈장도 있는데 독립훈장은 없다. 이상하지 않는가?
독립유공자도 건국훈장을 받는다. 그러나 건국훈장의 독립장이나 애국장,
애족장을 받으려면 건국 이후의 행적이 심사의 대상이 된다.
해방 이전의 행적만을 가지고 서훈을 주는 독립훈장이 필요한 이유다.
독립운동가 불법 총살한 이승만 정부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제2의 3.1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주역이 성진회와
독서회였고, 성진회와 독서회를 만든 이가 장재성 선생이었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나는 고교 시절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에 새긴 비문을 보며 자랐는데,
기념탑의 주인이 장재성이라는 사실을 그땐 몰랐다. 이후 장재성 선생이
7년이나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도 모르며 살았다.
장재성 선생이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몰랐다. 1950년 장재성 선생은
광주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다. 6.25가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형무소에 수감
중인 장재성을 총살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청춘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분에게 대한민국이 준 것은 총살이었다.
통일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김구 선생이 평양을 방문한 것처럼 장재성 선생도
해주를 방문하였다. 돌아와 김구 선생은 저격을 당했고, 장재성 선생은 또 투옥되었다.
1949년도의 일이다. 그런데 인민군이 한강 이남으로 남하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아무런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수감 중인 장재성을 총살하였다.
그러고도 지금까지 아무런 사죄의 변이 없다.
부끄러웠다. 남 보기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청와대의 높으신 분에게 항의하고
싶었으나, 나부터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올 초 '장재성을 생각하는 모임'을 만들었고, 서거 70주년을 맞이하여
추모제를 올리기로 하였다.
7월 6일 오전 11시 하늘도 슬펐을까?
추모제를 올리는데 비는 주룩주룩 내렸다.
독립운동 했는데도 심사조차 안 하는 이유
우리는 장재성 선생을 포함해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 독립유공자 72인의 서훈
요청서를 제출하였다. 국가보훈처로부터 답신이 왔다.
72인 중 29인에 대해선 '심사를 할 수 없다'는 답변이 왔다. 억장이 무너졌다.
장재성 선생이 심사비대상인 이유는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가 독립훈장을 신설하자고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건국이후의 행적과
무관하게 해방 이전의 행적만으로 서훈을 주어야 한다. 독립운동가들 절대
다수가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했는데 해방 후 행적을 문제 삼으니 서훈 판결이
더뎌진다.
이번에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독립운동가 중에는 정해두 선생과 이기홍 선생도 있다.
정해두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와 면서기를 했다.
이 일이 친일 흠결에 해당하여 서훈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기홍 선생은 4년의 옥고를 치렀다. 일경은 독립투사들을 감시하려고 대화숙을
만들었는데, 대화숙에 들어간 것이 친일행위라고 선생을 심사대상에서 배제했다.
독립투사들이 일경에게 얼마나 혹독한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는지 과연 보훈처 공
무원들이 알기나 할까?
도대체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라 하는 자들이 항일투사의 삶과 인격을 심사할 자격이 있는가?
이것만은 분명히 하자. 건국한 지 72년의 세월이 지났다. 단 한 명의 독립투사가
아직까지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 대한민국은 직무유기의 범죄를 범한 것이다.
일 백 명의 독립투사가 독립유공의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잘못된 법
때문이라면 그 법은 폐기되어야 할 악법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 수백 명이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항일 투사의 수는 1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72년 동안 서훈을
받은 이는 고작 1만 5천명이다. 현행의 법을 그대로 존치할 경우 10만 명이
넘는 항일투사의 공적을 심사하는데 요청되는 시간은 500여 년이라는 셈이 나온다.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독립훈장을 신설하자. 1945년 8월 15일 이전 독립운동의 공적만으로 서훈 여부를
판결하자. 이것만이 민족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첩경이다.
◎오마이뉴스 황광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