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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한겨레] 백선엽, 참군인 청빈한 삶?…강남역 수천억대 건물 아들명의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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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7-16 10:08 조회7,8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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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웅’과 ‘친일파’라는 상반된 평가 속에 백수를 넘기고 숨진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이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일제강점기 독립군 토벌 전문부대였던 간도특설대 출신이라는 비판에 보수세력

들은 ‘전쟁영웅인 백씨가 평생 군인으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백씨 삶의 다른 면모들도 있다. 그는 서울 강남역 앞에

2천억원 대의 건물을 가족 명의로 소유했던 자산가였지만, 수년에 걸쳐 가족

사이 송사가 벌어지기도 했던 게 대표적이다. 


 <한겨레> 취재 결과, 현재 백씨 장남은 서울 강남역 5번 출구 바로 앞에 위치

덕흥빌딩 소유주다.


지하 5층 지상 16층 규모의 대형 빌딩으로 대지가 853㎡(258평), 건평만 1만1381㎡

(3443평)에 이른다.


빌딩 전문 부동산업체 관계자는 “삼성타운이 들어오면서 여긴 부르는 게 값인데

해당 건물은 초역세권이라 평당 5억원은 될 것”이라며 “땅값(2020년 공시지가

683억원) 말고도 건물은 시가로 최소한 2천억~3천억원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등기부등본을 보면, 백씨는 장남 명의로 돼 있던 땅에 건물을 올려 1994년 12월

역시 장남 명의로 소유권보존등기를 마쳤다. 당시 장남 나이는 41살이었다.


백씨의 재산 형성 과정을 추적한 전필건 전 교육부 사학혁신위원은 “40대 초반

나이에 강남 한복판에 대형 건물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 

“명의신탁에 의한 차명소유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차명 소유는 백씨 가족이 2007~2010년 사이 벌인 재산다툼을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2007년 4월 백씨 장녀, 둘째 딸, 둘째 아들 3남매는 장남을 상대로 부동산처분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 인용 결정을 받았다.


장남이 자신 명의의 건물의 매매, 증여, 전세권, 저당권 등의 권리 행사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3남매는 이어 ‘진정명의회복을 원인으로 한 소유권이전등기 청구’ 소송을 서울중앙

제기했다.


등기부상 주인은 실제 주인이 아니니, 실제 주인 명의로 소유권을 이전해 달라는

주장이었다.


 2008년 8월 서울중앙지법이 3남매의 손을 들어주자 장남은 서울고법에 항소했고,

2010년 1월 다시 3남매가 일부 승소했다.


대법원까지 간 재산다툼 결과, 해당 건물은 장남과 백씨 부인이 절반씩 소유하게

됐다가, 2012년 백씨 부인이 지분을 350억원에 장남에게 매각하면서 지금은

온전히 장남 소유가 됐다.


재산을 장남 명의로 해놓았던 게 사달이 난 셈이다. 장남을 뺀 3남매는 미국

시민권자로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소송과정에서 장남과 척을 진 백선엽은 말년에 아내 노씨와 둘이서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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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끼리의 재산다툼 외에도 백씨 일가에는 유독 돈과 관련해 입길에 오른 인물들이

여럿이다.

 

백씨의 동생인 백인엽(1923~2013) 전 예비역 중장과 사촌누이인 증권가 큰 손

백희엽씨다.


일본 육군 항공소위 출신인 백인엽은 1956년 6군단장 등을 지낼 때 군수 비리를

저지른 혐의로 5·16쿠데타 당시 부정축재자 1호로 검거돼 무기형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사실 여기엔 백인엽의 비리와 함께 박정희와의 구원도 일정정도 작용했다.


6군단장 시절, 백인엽은 장병들을 완전 군장으로 연병장에 집합시킨 뒤 당시 부군단장

이었던 박정희의 철모를 지휘봉으로 톡톡 치며 “빨갱이 XX”라는 등의 모욕을 준 일이

있었다.


백인엽으로부터의 수모를 참다못한 박정희가 백인엽의 군수비리를 문제제기 했고,

이 일로 박정희는 이듬해인 1957년 9월 제7사단장으로 전보조치된다.


이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부패군인의 대명사였던 백인엽을 처단하고

싶었으나, 1948년 여순사건 뒤 숙군과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백인엽의 형

백선엽을 생각해 선처했다고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은 자신의 책(<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적었다.


숙군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이 남로당 활동으로 위기에 처한 박정희를

구해준 일화는 유명하다.


한편,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12연대 연대장으로 진압작전에 참가한 백인엽은

구례지역 부역자 색출과정에서 민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하는 과정의 최고책임자였다.


2008년 진실화해위는 백인엽을 직접 조사해, 그가 구례지역 민간인학살사건의 가해

책임이 있다고 진실규명한 바 있다.


죽다 살아난 백인엽은 교육자로 변신, 이후 인천지역에 선인학원이라는 학교 법인을

설립한다.


형과 자신의 이름을 더해 만든 그 사학재단에서 백인엽이 벌인 비리는 상상을 초월했다.


약 5700명의 학생을 정원 외로 부정입학 또는 편입시키고, 졸업장을 팔아 61억원을

받아 챙겼다.


지금 20억원(31평)에 거래되는 서울 강남 은마아파트가 1847만5천원에 분양되던 시절

이었다.


학교를 짓는다며 월남 피란민 판자촌을 철거해 원성을 샀고 확장을 이유로 중국인

공동묘지를 불도저로 밀어 외교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교직원들을 무조건 해고하고, 교사들에게 예비군 군복을 입혀서

보초를 서게 하고 순찰을 돌게 했다.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총 14개, 학생 수만 3만6400여명에 이르던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사학에서 벌어진 비리는 동양 최대였다.


당시 신문은 백인엽을 두고 ‘인천의 무법자’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1년 3월, 업무상 횡령, 배임수재, 건축법과 중기관리법 위반으로

또다시 백인엽이 구속된 이유다.


이후 선인학원에 관선이사로 내려온 이는 형 백선엽이었다. 동생이 단군 이래 최대

사학비리를 저지른 곳에 형이 이사로 온 것이다.


앞서 형 백선엽이 강남대로에 건물을 올린 1994년은 선인학원 소유의 인천대 등이

논란 끝에 국공립화 되던 때였다.


두 형제가 관여한 천문학적인 사학비리의 뒷감당을 국가가 나서서 하고 있는 사이,

백선엽은 강남에 대형빌딩을 세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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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의 사촌누이인 증권가의 큰손 백희엽씨도 돈으로 한국사회를 주름 잡았던 

인물이다.


1975년 중동건설붐을 타고 건설주가 폭등하면서 증권가에 이름을 날리게 된 백씨는

동아건설을 비롯, 해외 건설주를 대량매집해 거액을 벌었다.


백씨가 한창 명성을 날릴 때에는 단순히 어떤 주식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만 나도 관련

  주식이 폭등할 정도였다고 한다.


1995년 사망한 백씨는 40년대 후반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고 박용학씨의 부인

이기도 했다.


천수를 누린 백선엽씨를 마지막으로 치부(致富)의 한 획을 그은 백씨 집안 내력도 대가

마무리됐다.



여전히 백씨가 청빈하다고 주장하는 보수세력들은, 미군도 그를 극진히 예우한다며 전쟁

영웅으로 칭송한다.


그러나 백씨가 군인이었을 때, 미국의 평가는 정반대였던 것 같다. 5·16 쿠데타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의 필립 하비브 정치담당 참사관은 본국에 보낸 장문의 기밀문서에서 “(백선엽은)

혜택과 진급, 적절한 사면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의 파벌적 역량을 축적했다”며 “백 장군은

다른 참모총장들보다도 더욱 부패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기술한 바 있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