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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독립군이 되기 위한 첫걸음,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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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7-29 13:30 조회8,34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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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이백오십이년 삼월일일은 / 이내 몸이 압록강을 건넌 날일세
연연이 이 날은 돌아오리니 / 내 목적을
이루기 전 못 잊으리라


위 노랫말은 만주에서 널리 부르던 <3.1절 노래> 1절이다.


노래의 끝 표현은 "같이 싸우자"이다.


노랫말의 3월 1일은 실제 망명한 날이 아니라 3.1혁명을 계기로 망명했다는

뜻이다.


망명 상황에 맞추어 연도는 다르게, 곧 1919년, 1920년, 또는 1925년으로

부르기도 했다.


3.1혁명 후 망명하여 독립을 이룰 때까지 망명하던 날을 잊지 않고 싸우자고

다짐하고 있다.


망명은 3.1혁명과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노래한다. 만주의 기차 안에서 쉽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동포들이 널리 불렀다. 


이 내 몸이 압록강을 건너올 때에 / 가슴에 품은 뜻 굳고 또 굳어
만주들에 북풍한설 몰아부쳐도 / 타오르는 분한 마음 꺼질 바 없고
오로라의 얼음산의 등에 묻혀도 / 우리 반항 우리 싸움 막지를 못하리라


위 노랫말은 3.1혁명 후 만주에서 널리 부르던 <고난의 노래> 1절이다.


굳은 의지를 가지고 망명하여 어떤 고난이 닥쳐도 싸움, 곧 독립투쟁을

이어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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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이란 무엇인가? '죽은 목숨'이란 뜻이다.


'왜적'의 압제 아래에서는 살 수 없으니, 새 땅에서 목숨 걸고 투쟁하여 독립을

찾겠다는 뜻이다. 망명은 도피가 아니라 결사 항전의 시작이었다.


경술국치 후 신민회가 주도한 집단 망명도 그러했다.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

하기 위해, 일가, 친지 들이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안동 유림의 지도자 김대락은 함께 망명한 만삭의 손자며느리와 손녀가 만주

땅에서 아이를 낳았을 때 '적의 땅'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지 않았음을 기뻐

하였다.


경술국치 직후 안동 일대에서는 5명의 유학자가 자결 순국했는데, 김대락은

이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 경계로 삼기도 했다.


곧 '적의 땅'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결의를 다지고 망명에 나섰던 것이다.

3.1의 만세함성은 일제의 무력으로 꺾이고 곳곳에서 학살이 자행된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박은식)에 따르면 사망 7509명, 부상 1만5761명,

체포 4만6948명이었다.


부상 이후의 사망, 옥중 고문에 의한 사망 등을 감안하면 사망은 더 많다.

청년들은 일제 무력의 학살이 자행되는 땅에서 살 수 없음을 몸으로 겪고

망명을 결단했다. 그것은 목숨을 건 투쟁의 시작이었다.


일제 정보문서를 보면 3.1혁명 후 만주 곳곳에서 '결사대', '감사대(敢死隊)'

조직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독립군'이라는 실제 무장대오가 편제되기 전이다. 곧 무기는 없지만 목숨을

걸고 대오를 만들어 일제와 싸우겠다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실제 김학규(뒤에 조선혁명군 참모장)는 3.1혁명 직후 만주에서 청년들과

함께 손가락을 베어 "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는 혈서를

쓰고 결사를 조직했다.
  
독립군이 되기 위한 첫 걸음, 망명
 
3.1혁명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청년들을 단련시켰다. 당시 만주로 망명했던

청년지사들의 회고를 보면 모두 자신이 사는 지역의 3.1혁명을 주도했다.


한철수(광복군총영. <나의 길>)는 도원면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체포당해 1달

옥고를 치르고 12월에 망명한다.


김경하(유하현 은양학교 교사.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는 강계읍 시위를

주도하고 체포되었다가 병으로 가출옥하고 이어 9월초 망명했다.


정이형(정의부 의용군 중대장. <정이형 회고록>)은 장성의 만세시위를 주도

하고 1922년 11월 만주로 망명했다.


그 외에도 김훈(신흥무관학교 졸업. 북로군정서 소대장)은 평양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가을에 만주로 망명했다.

몇 예이지만 망명 청년들은 대개 3.1혁명의 현장에서 독립투쟁을 단련했다.


목숨을 건 망명 투쟁은 이 단련을 기반으로 했고, 김창환(통의부 의용군 사령관)

망명해 온 정이형을 만나자 제일 먼저 "왜놈의 단련을 얼마나 받고 오시며,

얼마나 고생을 하셨오"라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배로, 기차로, 인력거로, 또는 얼음 위의 도강으로 망명길은 달랐지만, 긴장과

위험 속에 망명이 이루어졌다.


출국허가가 없는 망명길은 '잠행'이었고 긴장 속에서 도강한 뒤에 비로소 안심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잡히면 바로 총살당하는, 일제 당국이 체포현상금을 내걸었던 망명이

있었다.


바로 일본군 현역장교였던 김경천, 지청천의 망명이다. 이들의 망명은 독립

진영에게는 독립전쟁의 기반이 공고해지는 희망의 망명이었고, 일제 당국

에게는 충격의 망명이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 한인 생도들은 경술국치를 맞아 방향을 논의했고 일단

군사교육마친 뒤에 때를 보아 일제히 망명하기로 다짐했다.


동경의 2.8독립선언과 3.1만세시위는, 망명투쟁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경술국치 후 '3.1'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는 그들에게 '와신상담'(김경천)의 시기

였고, '혁명의 길을 찾느라고 고심참담'(지청천)한 시기였다.


3.1의 만세시위를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제2의 매국자'가 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독립·혁명투쟁을 위해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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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 이후의 망명은 경술국치 전후의 망명과 비교된다. 경술국치 전후의

망명은 근거지 건설을 위한 일가·문중·친지 등의 집단 망명이다.


3.1혁명 이후의 망명은 개인 망명이다. 뜻있는 청년들이 모여 함께 도강하기도

했지만 모두 3.1혁명의 세례를 받은 개인 망명이었다.


그것은 독립전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경술국치 전후로 의병이 많이 망명

했지만 실제 항일무장대오로 전환·유지하지 못했다.


3.1혁명을 계기로 무장투쟁론이 고조되었다. 따라서 망명 목표는 항일전쟁을

치를 군인이 되는 뜻이 강했다. 만주·노령에 구축된 항일 근거지를 바탕으로

'전사(戰士)'가 되기 위한 개인의 망명이었다.

홍원군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강우건(군비단)은 망명 후 장백현에 "3.1운동에

감응되어 실지 무장 행동을 찾아온 인사들도 퍽 많았다"고 회고했다.


독립군단에 망명 청년이 오면 으레 군사교육을 받기 위한 '신입생'으로 인식

했다.


그리고 상해에 망명 청년이 가면 "환경 좋은 데서 공부나 하지," 만주에서

군사교육을 받지 왜 상해로 왔느냐고 에둘러 나무랄 정도였다.
 
3.1혁명 후 최소 1,000명 이상의 청년이 망명했다
 
당시 망명 청년의 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만주 항일근거지에서 민족교육

받은 청년들과 함께 군사교육을 받고 독립군의 근간이 된 데서 간접으로

헤아릴 수 있다. 물론 망명 청년이 다 독립군이 되지는 않았다.


김경하처럼 건강 때문에 군인이 되지 않고 민족학교 교사가 된 경우도 있어

독립군 수로 전체 망명 청년 수를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는

있다.

몇 예를 보면 이렇다.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졸업생은 300명 안팎이었는데,

만주에 '집과 연고'가 있는 150명은 휴가를 주고 150명으로 연성대를 편제했다.


적어도 50%가 국내에서 망명했다. 만주에 '집'이 있는 경우로 제한하면 실제

만주 출신 교육생은 150명이 안되고, 국내 망명 청년 수는 더 많게 된다.

신흥무관학교는 세 곳에 학교가 있고 또 3.1혁명 후 3개월, 6개월을 기간으로

계속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 가운데 하나의 예를 들면 1919년 11월 '합니하

신흥학교 1·2반 졸업생' 67명 가운데 35명이 국내에서 망명한 청년이었다.


52% 정도이다. 사관연성소의 비율과 거의 같은데, 남북만주를 막론하고 만주

와 국내 출신 비율을 같게 하려는 선발 원칙이 있었다 하겠다.

신흥무관학교의 3.1혁명 이후 졸업자는 1920년 초에 1200-1400 명이었고

'새로 모집되어 아직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은 다수'였다.


시기별, 지역별 상황이 다르기에 단순 대입은 어렵지만, 52% 비율로 환산하면

적어도 1920년 초 현재 600-700여 명이 국내에서 망명한 청년이고 새로 모집

하여 훈련을 기다리는 인원을 감안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많다.


실제 각 독립군단은 망명 청년을 우선 신흥무관학교에 보내 군사훈련을 받게

했는데 1919년 9월 현재 모두 수용할 수 없어서 임시로 농가에 거주하게 했다.


계속 입교를 기다리는 인원이 있었다. 여기에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서 졸업생

150명과, 무관학교 설립을 준비하던 국민회로 찾아간 청년, 다른 독립군단으로

찾아간 청년을 고려하면 최소 1,000명은 넘는다.

1000명이 넘는 청년의 망명은, 3.1혁명에 참가한 청년들이 일제 무력에 굴복

하지 않고 독립과 민주공화국 수립을 위한 무장투쟁의 주도세력으로 성장,

전화됨을 뜻했다.


곧 망명은 개인별로 이루어졌지만, 이후 독립전쟁을 전개할 전사 집단이 형성

된 것이다.


물론 만주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성장한 청년들도 전사 집단 형성의 중요 부분

이었다.

망명은 국내 독립진영과 만주 독립진영 사이의 연락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일제 당국은 독립진영을 파괴하기 위해 밀정을 침투시키려 했는데 이에

대비하여 독립진영의 보안 대처가 강고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경우 국내의 신임장이나 신표(信標)를 지니고 이름도 가명으로

바꾸기도 했다.


정해진 약속에 따라 만주에서는 망명을 안내하는 인원이 배치되기도 했다.


망명을 돕는 국내 조직은 3.1혁명 직후부터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를테면 최재화 조직이 있다. 그는 1919년 6월부터 김영철, 조강제와 함께

만주 독립진영과 연락하고 국내에서 청년들을 모집해 망명시키는 경로를

구축했다.


최재화는 국내에서 청년을 모집해서, 손바닥에 십(十)자를 표시하는 비밀암호

를 가르쳐 보냈다.


신의주에서 여관업을 하는 김영철은 암호를 확인한 후 이도성에게 안내하고,

이도성이 비밀리에 이들을 도강시켜 만주 안동현으로 가게 했다.


조강제는 그들에게 다시 비밀표식('10전 지폐' 뒷면에 '강(强)'자를 눌러씀)을

주어 독립군단 소재지로 보냈다. 독립군단에서는 이를 보고 믿을만한 사람임

을 확인했다.


이 경로를 통해 권원화, 김종엽 등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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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7월 이후에는 임시정부의 국내 비밀 연락망인 연통제가 구축되면서

이를 통해 망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김경하 등은 강계의 이준겸

에게 신임증을 받아갔는데 이를 연통제의 '암호공작'이라고 하였다.


평양·안주 등지의 청년은 그 신임증을 가지고 망명했다. 거창의 김태연 그룹의

망명도 연통제를 바탕으로 했다.


8월에 김태연, 이덕생, 오형선 등은 만주의 '의용군 모집' 사실을 알고 군자금

을 모집해서 만주로 갈 것을 논의했다.


김태연은 주남수, 이사술, 이익두, 백기주 등 4인을 인솔해서 만주로 망명해

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켰다.

3.1혁명 후 청년들의 망명을 주도하고, 나아가 독립전쟁의 전사로 만들고자

했던 국내 조직은 전국 각지에 존재했다. 앞서 만주 독립군단으로 망명한 청년

이 최소 1000명 이상이라 밝혔는데, 전국 각지에서 이들의 망명을 돕던 조직

까지 감안하면, 망명 관계망의 인원은 몇 배로 증가한다.


이들 모두 3.1혁명의 영향 아래 망명, 나아가 독립군 편제의 바탕이 되었다.

경술국치 전후의 집단망명을 통해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구축하고 있던 만주·

노령의 독립진영은 3.1혁명 후 무장대오의 편제에 박차를 가했다.


부민단·정의단·권업회 등 동포사회의 자치활동을 기반으로 독립 근거지에서

성장한 청년들도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집결했다.

그리하여 3,1혁명 후 항일전쟁을 치를 실제 무장대오, 곧 독립군이 편제되었다.
 

◎ 오마이뉴스 이중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