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9월 말부터 10월 초 사이 충북 청원 지역을 포함해
미원, 괴산, 보은 일대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던 부대가 고 백선엽 장군이
사단장이었던 육군 1사단 11연대와 15연대라는 유력한 증언이 나왔다.
2010년 12월 활동이 종료된 진실화해위에서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조사팀장
을 맡았던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 소장은 28일 경기도 고양시 인권평화연구소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를 만나 "진실화해위 자료와 국방부가 편찬한 <한국
전쟁사> 등을 바탕으로 백선엽의 부대가 충북 청원 지역 등에서 주둔할 때 민간
인 학살 등이 발생한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는 "백선엽 부대가 죽인 민간인은 충북 지역을 포함해 전쟁 기간 최소 1000
명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백선엽 부대의 민간인 학살은 한국전쟁 전 5사단 15연대(전남), 1950
년 9월 1사단 12연대(경북 상주), 1951년 12월 지리산 일대의 '백야사(백선엽
야전 사령부)'에 의한 사건들이 알려져 왔는데, 1사단 예하 다른 부대인 11연대
와 15연대도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백선엽 장군이 사단장이었던 1사단이 북상
하는 과정에서 광범위하게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오는 12월 10년만에 재출범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이하 진실화해위)'에서 백선엽 부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 재조사가 이루어질
지 주목된다.
진실화해위가 기록한 충북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
1970년대 국방부가 펴낸 <한국전쟁사> 통해 '백선엽 부대'로 특정
신 소장은 진실화해위 조사가 끝난 뒤에도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추적을 이어왔다.
신 소장은 "경북 상주에서 백선엽의 1사단 12연대, 충북 보은에서 1사단 15연대,
충북 청원에서 1사단 11연대가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고 말했다.
사실 이들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진실화해위 보고서 <충북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에서 당시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950년 9.28 수복 이후 국군이 진군했고, 다음날인 9월 29일 오영식과 이원규는
마을에
국군이 지프차를 타고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구경 나갔다가 마을 큰 마당에 모
인 다른 주민들과 함께 부역혐의로 가덕지서로 연행됐다. 이들은 마을 앞마당에서
국군의 질의에 '뻣뻣하게 대답했다'라는 이유로 총살됐다."
보고서에는 또 "가덕면 일대 31개 마을에서 100여 명의 사람들이 가덕국민학교로
연행돼 왔다, 이들은 1950년 9월 29일 저녁 병암리 가덕국민학교와 가덕지서 동남
방향 앞산 방공호에서 총살됐다"라고 기록됐다.
그러나 당시 보고서에는 가해 부대가 백선엽의 1사단이라고 단정하지 못했다.
'국군'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만 서술되어 있다. 이에 대해 신 소장은 "진실화
해위원회 활동 당시에는 충북 지역, 특히 청원 지역 민간인 학살에 대해 백선엽 부
대가 자행한 일이라고 완전하게 특정하지 못했다"면서 "위원회는 민간인 학살에 대
해 '설마 우리 국군이 민간인을 고의로 살해했을까'라고 생각을 했고, 이 때문에 군사
작전과는 무관한 우발적인 사건으로 분류해서 봤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신 소장은 1970년대 국방부에서 편찬한 <한국전쟁사>를 통해 1950년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경북 상주와 충북 청원, 미원, 괴산, 보은 지역에서 활동한 국군
이 1사단임을 확인했다.
실제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한국전쟁사>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사단은 제11연대를 (충북) 미원 부근에, 제15연대를 (충북) 보은 부근에 각각 배치
해 북한군 패잔병들을 포위 섬멸하고자 하였다. 1950년 9월 29일 미원 부근에 출몰
하던 북한군은 회인-청주간 도로를 차단한 후 피반령-군자산을 넘어 북쪽으로 퇴각
하려고 하였다. 이에 제11연대는 일대를 점령한 북한군의 잔존 병력들을 격파하면서
추격을 계속하였다."
또한 <한국전쟁사>에는 "(1사단) 11연대와 15연대가 (충북) 보은-미원 일대를 완전
히 장악하자 10월 2일 1사단은 사단사령부를 청주로 이동하였다"면서 "이 무렵 사단
예비인 12연대는 상주 일대에서 잔적 소탕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는 진실화해위 공식 보고서에 '경북 상주와 충북 청원, 미원, 괴산, 보은 일대
에서 국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라고 기록된 시점과 일치한다.
<한국전쟁사> 편찬에는 백선엽 본인도 고문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백선엽 회고록 기록과도 일치... 2기 진실화해위 조사 주목
정확한 시점은 나와있지 않지만 백선엽의 구술 회고록 <백선엽 6.25전쟁 징비록>에
도 비슷한 서술이 나온다.
"미1군단의 명령은 (1사단이) 경북 군위로 진출해 잔적을 소탕한 뒤 공격 대열에 합류
하라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경북 상주에서 충북 보은과 미원을 거쳐 약 1주일 동안 작
전을 벌이며 길을 나아갔다, 골이 깊었던 속리산 일대에는 잔적이 조금 남아 저항을 벌
이기도했다, 우리는 그들이 출몰하면 바로 소탕했다, 우리는 그들을 진압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신 소장은 "백선엽의 민간인 학살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백선엽의 1사단이 북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면서 "백선엽은 자신이 죽인 민간인을 모두 '빨치산'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당시 수많은 증언을 비롯해 피해자들이 남은 상황이다, 무엇보다 인민군이 철수
한 상황에서 (충북지역) 속리산 인근에 실제로 빨치산이 남아 있었는지도 확인이 필요
하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백선엽이 말하는 전과의 상당수는 왜곡되거나 부풀려졌다, 그가 죽인
전공의 상당수가 민간인일 가능성도 높다"면서 "12월에 다시 출범하는 (2기) 진실화해
위를 통해 더 많은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1920년 생인 고 백선엽 대장은 1943년 4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한 뒤, 항일세력을 소탕
하는 특수부대로 악명을 떨친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활약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김백일 등과 함께 미군정 통치하의 남한땅으로 넘어온 뒤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육군
정보국장이 됐다.
이후 전남 광주지역에서 5사단장을, 한국전쟁 초반에는 1사단장을 역임했다.
1952년 7월부터 육군참모총장 및 계엄사령관을 지낸 뒤 1953년 1월 대한민국 국군
최초 대장이 됐다.
백 장군은 지난 10일 100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안장됐다.
2009년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
된 터라 그의 현충원 안장을 놓고 사회적 논란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