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의 또 하나의 적, 밀정 2
항일 무장대오의 편제·작전 등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적에게 정보가 누설되지 않는 보안 대처가 필요하고 반대로 일제 군경과 밀정의 활동에 대한 정보를 확보해야 했다. 정보가 누설될 위험은 독립진영에 고정된 밀정이 침투할 때 가장 크게 발생하기 때문에 독립진영에서는 이에 대해 강력히 조처했다. 독립 진영에 참가할 뜻을 품고 찾아갈 때는 소개장, 신임장이 필요했다.
군 관계의 보안은 더 철저했다. 최재화, 김영철, 조강제 등은 국내의 청년을 모집해 만주 신흥무관학교와 독립단에 파송할 계획을 세웠다. 최재화는 청년을 모집하고 김영철은 여관업을 이용해 미리 정한 부호를 가지고 오는 청년을 만주로 보냈다. 곧 독립의식을 가지고 군관교육을 받으려는 학생이므로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보안 신표(信標)가 국내에서 신흥무관학교에 이르는 루트에 약속되어 있었다.
안해용은 광복단 '경상남북도 특파원'으로 임명받고 광복단에 입대할 청년을 모집했다. 그리고 '숫자 12를 가로 쓰고 그 밑에 횡선(橫線)을 그은 다음 그 밑에 서명 날인한 종잇조각을 붙여 약장(約章)'을 만들었다. 망명할 청년이 이 약장을 보여주어야 압록강의 도선(渡船) 책임자가 비로소 청년을 도강시켜주었다('판결 대정 12년 형공 제12호').
조선혁명군 국내 특파원 유광호는 조선혁명군 입대자를 모아 만주로 파송했다. 그 때 특파원으로 임명한다고 쓰고 '우회(友會)'라고 날인한 신임장을 두루마기 깃 속에 꿰매어서 신표로 삼았다. 그리고 중간 안내자와 서로 안전을 확인할 때는 '참(站)'이란 암호를 썼다('조선혁명당 관련 사건-김동보 신문조서'). 일경에게 체포된 안내자가 다른 암호는 모른다고 한 사실로 보아 노정 단계의 여러 안내자가 서로 다른 암호를 썼다.
신흥무관학교, 광복단, 조선혁명군의 예를 보았지만, 당시 만주의 항일무장대오 모두에 위와 같이 밀정의 침투를 막는 보안체계가 갖추어 있었다. 따라서 모르는 사람이 독립진영의 정보를 알고자 하면 수상하다 하여 우선 밀정으로 단정했다.
3.1혁명 전 한용운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한용운은 서간도에 와서 이회영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행동은 수상하지 않았지만 소개 없이 왔다 해서 독립진영에서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머물다가 귀환하는데 한 청년이 의심을 풀지 않고 총을 쏘았다. 한용운은 이회영을 만나 자신에게 총을 쏜 사람을 보고 싶다고 했다. 이회영은 한용운을 영웅이라고 적극 평가했다(이은숙,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 한용운은 총을 쏜 것을 탓하지 않았고 독립진영의 밀정에 대한 경계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항일부대 편제가 급속하게 이루어지던 3.1혁명 후에 밀정에 대한 경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여행자 가운데 수상한 자가 있으면 밀정으로 의심하고 심문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조특보 제32호').
북로군정서의 보안 대처는 밀정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자의 경험이 신문(<동아일보> 1920.9.20, 21, 25)에 실려 있어 자세히 알 수 있다. 이러했다. 낯선 자가 지나가면 북로군정서 경호대원이 조사한다. 인적 사항과 짐을 검사해 수상한 점(예컨대 일제 경찰의 명함)이 있으면 밀정이라 추정하고 경호본부로 압송한다. 며칠 구금 후 경호부장이 심문하여 혐의가 풀리지 않으면 군정서 사령부로 보낸다. 군정서 심판처(審判處)에서 밀정 여부를 판정하는데 확정 때까지 감옥에 가두고 독립정신 교육을 한다. 밀정 혐의자의 혐의를 풀 수 있는 지인이 심판처로 와서 변호를 하면 석방된다. 밀정으로 판명되면 총살했다.
결국 북로군정서의 밀정 심판은 경호대원-경호본부-심판처의 세 단계를 거쳤다. 사령부 참모 이정의 '사령부 일지'를 보면, 혐의자를 최종 단계로 압송하는 것은 경찰과에서 담당하고, 혐의자를 경비대 영창에 가둔 뒤에 최종적으로 밀정 여부를 판단한 것은 군법국(軍法局)이다. 신문 기록의 심판처는 군법군 산하의 밀정 전담 기구였다 하겠다.
세 단계를 거친 것은 신중한 판단을 위해서였다. 석방된 자는 자신이 가기 전에 감옥에 60여 명 있었는데 3명이 총살되고 9명이 석방되었다 했다. 자신이 감옥에 갔을 때는 48명이었는데 일부 영사관 밀정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행상이거나 친척을 찾아가는 사람이라고 했다(<동아일보> 1920.9.21). 1-2단계에서 밀정 혐의를 받고 3단계로 압송되지만 3단계에서 많은 이들이 혐의를 벗고 석방되었다. 3단계 감옥에 60여 명이나 있을 정도로 당시 북로군정서는 밀정 침입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이정이 '사령부 일지'에 밀정 체포나 처형 사실을 기록할 정도로 밀정 대처는 중요했다. 60명 가운데 3명이 밀정으로 판명되어 총살될 정도로 북로군정서에 잠입하기 위해 다수의 밀정이 파견되었다. 1920년 1월 이후 100여 명이 밀정으로 체포되어 총살당했다는 이야기도 북만주 동포 사회에 있었다(<동아일보> 1920.9.25). 풍설이므로 정확한 수는 아니지만, 일제가 북로군정서의 정보를 캐기 위해 밀정을 다수 파견하고, 반대로 북로군정서는 밀정의 잠입을 막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일제 영사관이 군무부 황병길(黃炳吉) 부대에 침입시킨 밀정은 처음에는 밀정의 혐의를 받고 구금되었다가 독립운동 참가자라고 속여 총살당하지 않았다. 부대와 함께 행동하다가 탈출해 밀고했다. 이 밀정은 밀정 혐의를 받으면서도 글씨를 잘 쓰는 것을 이용해 부대 서류를 정리하는 군무부 서기가 되어 부대 편제 등의 중요 정보를 캐낸 뒤에 탈출했다('기밀공신제59호'). 밀정 혐의자가 부대 중요 서류를 정리하게 했다는 점에서 보안 대처가 허술했다.
남만주의 한족회는 일제가 밀정을 이용해 독립진영 정보를 캐내려는 사실을 알고 다른 지방에서 오는 여행자에 대해 엄중하게 경계했다. 기관지 <한족신보>에도 기사를 실어 밀정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켰다. 침입자가 밀정으로 판명될 때는 처벌했다('기밀공제14호').
남만주도 밀정 침투를 막기 위해 보안 대처가 강했지만 밀정의 침입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이를테면 유하현 대사탄 한족회 검찰 신광호(申光浩)가 일제 영사관의 밀정이었다('기밀공제13호'). 밀정·적정(敵情) 탐색 등을 임무로 하는 검찰이 오히려 밀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낮은 직책 때문에 한족회 지도부에 접근할 수는 없었고 따라서 중요 정보가 그를 통해 일제에게 노출되지 않았다.
독립군은 특히 작전 정보가 적에게 노출되지 않게 노력했다. 군무부(황병길부대)는 부대 주둔 때 전체 병력이 모여 있으면 적의 정보망에 노출되기 쉽다고 판단하고 여러 부대로 나누어 분산 주둔케 했다. 국내에 진입해 작전할 때는 행선지를 군무부장과 '출장'가는 부대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했다('조특보 제32호').
왜적의 경계가 강화될수록 보안도 더 강화되었다. 정의부는 국내 작전 부대를 몇 조로 나누어 진입케 한 뒤에 한곳에서 만나 작전하도록 했다. 한 조는 다른 조의 진입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지정된 곳에 가서야 만나 함께 작전할 수 있었다. 이를 총괄하는 것은 사령부였다. 작전 중 한 조가 일제 감시망에 걸려 혹여 피체되더라도 다른 조는 계획에 따라 진입해서 작전했다. 피체된 조가 고문당하더라도 다른 조의 진입을 모르므로 그 정보를 누설하지 않을 수 있게 한 것이다.(주1)
작전 성공을 위해서는 왜적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따라서 독립군은 여러 형태로 왜적 정보를 확보하려 했다. 이를테면 정의부는 작전부대가 통과할 지역의 통신원에게 연락해서 왜적 감시대의 상황을 점검토록 하고 안전이 확보된 뒤에 그 지역을 통과해서 작전을 수행했다.(주2) 곧 지역 통신원이 왜적 감시망의 역할을 했다. 군무부는 국내 경찰의 자세한 배치표를 지니고 있었다. 독립진영에 우호적인 지역 관리나 독립진영으로 귀순한 일경이 제공한 정보였는데('조특보 제32호') 군무부는 이를 이용해서 경계망을 피해 국내 작전을 수행했다.
청산리전투 후 노령으로 북정한 부대들이 통합하여 편제된 대한독립군(총재 대리 김혁)은 북로군정서 사관양성소 출신을 군사탐사원(軍事探査員)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독립진영의 연락을 담당하고 만주 동포사회의 동향을 파악하며, 나아가 '일본 관헌과 밀정의 동정을 정찰'하는 것이 임무였다('기밀제367호'). 항일 역량의 강화를 위해 정보 수집과 밀정 정찰을 임무로 하는 기간요원이 활동했던 것이다.
항일전투에서 군사보안은 매우 중요했다. 독립군의 작전 성공을 위해서 밀정의 접근은 차단하고 역으로 일경 등 왜적의 동태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를 확보해야 했다. 남북만주 각 독립군단은 모두 제도적으로 밀정을 색출하는 경로를 가동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밀정이 독립진영에 잠입하여 정보가 일제에게 노출되기도 했는데 이는 보안 대처가 완벽하지 못했다는 한계이면서, 아울러 남북만주에서 거세가 고조된 독립전쟁 열기에 일제가 경악하며 이를 탐지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밀정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청산리전투 후 군사 작전에서의 보안은 더욱 철저했으며 부대를 분산해 다른 부대 존재를 모른 채 국내로 진입하는 등의 형태로 작전을 수행했다. 또 독립군은 작전 성공을 위해 통신원, 군사탐사원, 전향한 일경 등을 통해 작전 대상에 대한 정보를 확보했다. 수많은 독립군 작전의 바탕에는 작전대상인 왜적에 대한 정보 확보가 있었다.
밀정 토벌
독립진영의 동포들은 밀정을 창귀(?鬼: 먹을 것 있는 곳으로 범을 이끄는 못된 귀신), 금수(禽獸: 짐승), 응견(鷹犬: 사냥매·사냥개), 정견(偵犬: 정탐개), 주구(走狗) 등으로 불렀다. 못된 귀신과 짐승, 특히 개라 한 것이다. 하지만 짐승도, 특히 개는 주인을 따르고 배신하지 않는데 이들은 돈 때문에 나라와 겨레를 배반했으므로 '돈 받아먹고 친일파 노릇하는 짐승보다 못한 자'라고 했다.(주3)
앞서 보았듯이 독립군 지도자들이 밀정의 밀고로 희생되고 항일작전도 어려움에 처했는데, 그뿐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독립군 사병과 비무장 독립지사들도 밀정 때문에 많이 희생됐다. 왜적과 전투하다 전사하는 것은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친 군인으로서 두렵지 않고 아쉬울 것도 없지만, 밀정 때문에 덧없이 희생되는 것은 통탄할 일이었다. 주구 밀정이 수많은 독립지사를 밀고해 희생시켰다. 만주에 밀정이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독립지사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밀정에게 희생되었다 하겠다. <독립신문>(1923.3.14)은 그 실정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의인열사(義人烈士)가 피배(彼輩)의 독아(毒牙)의(에) 리(罹)하야 신명(身命)을 허(虛)ㅅ되히 빼앗기며 기밀 대사가 피배의 화안(禍眼)에 촉(觸)하야 와해(瓦解)에 귀(歸)하는 사(事) 역기수난계(亦其數難計)라 적(賊)의 정탐과 적의 관리는 왜적보다도 기죄(其罪)가 중[하다.]"
열사들이 밀정의 독이빨에 물려 목숨을 헛되이 빼앗기고 독립진영의 중요 기밀이 밀정의 못된 눈에 걸려 실패하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그 죄가 왜적보다 더하다는 것이다.
밀정은 만주 일반 동포들도 많이 희생시켰다. 만주에 정해붕이란 밀정이 있었다. 무고한 농민도 밀고해서 고생하게 만들던 자인데, 그의 밀고 때문에 죽은 사람이 숱했다.(주4) 만주 밀정조직인 보민회의 최정규는 "농사짓는 양민을 독립단이라 하야 몇 천 명 동포를 살해케 하고 무죄 양민을 못살게 했다."(<동아일보> 1925.9.4.)
밀정은, 따라서 왜적처럼 토벌의 대상이었다. <독립신문>(1920.2.5)에 실린 유명한 '칠가살(七可殺)'은 금수 같이 국가에 큰 해를 끼치는 흉악한 자를 적으로 규정하며 사형시킬 '전시(戰時)의 적'으로 7가지를 제시하였다. 그 가운데 밀정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가 적의 수괴, 불령일인(不逞日人)·헌병관헌(憲兵警官) 등 왜적이고 두 번째가 이완용 등의 매국적(賣國賊)이고 그 다음이 창귀, 곧 밀정이다.
창귀를 가살
혹은 고등 정탐, 혹은 그냥 형사로 아(我) 독립운동의 비밀을 적에게 밀고하거나 아 지사를 체포하며 동포를 구타하는 추류(醜類)들이니 선우갑(鮮于甲), 김태석(金泰錫), 김극일(金極一)과 같은 흉적(兇賊)이라. 특히 중요한 비밀을 적에게 밀고하거나 중요한 인사를 체포한 자에게는 반드시 즉시 복수를 하여야 할지니 이는 동지에게 대한 의무일 뿐더러 차등 적류를 징계하는 가장 유력한 수단이라, 여차한 죄악을 범한 악한은 천애지각(天涯地角) 어디로 가더라도 사(死)의 저주를 도피치 못하도록 함이 애국자의 의무니라.
대한독립단의 「토벌령」도 네 종류의 토벌 대상을 열거하며 왜적의 앞잡이가 된 관헌 다음으로 '왜적의 응견이 되어 정탐으로 종사한 자'를 토벌한다고 선언했다.
토벌은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다. 우선 밀정의 이름과 해악이 발견되면 독립군의 '공판에 회부'했다. 이를테면 <독립신문>(1923.3.14)은 만주의 보민회 등 일제 주구조직의 해악을 지적하며 "밀정 겸 난도(亂徒)의 괴수 이완구(李完求), 유기선(劉琪璇), 이봉춘(李奉春), 강달주(姜達周), 강익주(姜益周), 김이구(金利狗) 등을 먼저 아 독립군의 공판에 (붙인다)" 공언했다. 밀정이라고 바로 처단하는 것이 아니고 우선 독립군단에서 처단 여부를 공적으로 판단하는 절차가 있었던 것이다.
또 독립군단에서는 밀정에게 죄를 뉘우치고 옳은 길로 돌아설 기회를 주었다. 대한독립단은 토벌 대상에게 '토벌령', '선고장' 등을 보내 정한 날자(3일 또는 10일) 안에 직을 그만두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는 용서한다고 밝혔다(<대한독립단 토벌령>). 대한독립군은 「특고(特告) 순사보조원(기타 밀정 공람)」을 발표해서 밀정에게 회개의 기회를 준다고 밝혔다.
곧 왜적의 순사보조원·밀정에게 동족을 살해하고 왜족에게 충성하는 천인공노의 죄를 일깨우고 정의와 인도를 따르도록 촉구하면서 증표가 확실하면 독립군에 편입하도록 허락한다고 하였다('수밀 제102호 기976'). 실제 어릴 때 독립단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는 차경수는, 독립단이 정탐(밀정)을 잡아 우선 설득시켜 그가 회개하면 독립단으로 귀순시키고 아니면 처단했다고 회고(<호박꽃 나라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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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만주 한민회를 본떠서 평양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조직은 한편으로 독립군의 국내진입을 원조하고 한편으로 '관헌의 밀정, 군자금에 응모하지 않는 자, 관공리를 사직하지 않는 자, 기타 독립운동에 방해하는 자에 대해 협박문을 보내 경고할 것'을 결정했다('밀수제102호 기1172'). 또 통의부는 주구를 토벌하는 실제 행동에 앞서서 3-4차의 정밀조사를 했고, 되도록 사로잡아 본부에서 회개시키려고 노력했다. 앞서 보았듯이 통화현 보민회지부장이 잘못을 뉘우치고 독립군에 귀순한 것은 밀정 처단에 앞서서 회개시키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그러나 죄를 뉘우치는 밀정은 드물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토벌/처단만 남았다. 최악질 밀정 최정규를 토벌하려 했던 박희광은 "그런 자들은 몇 번 더 일러야 듣지도 않음으로 부득이 죽이게 되는 것"이라고(<동아일보> 1925.9.4) 토벌이 불가피함을 말했다. 창성군 밀정 김창일(金昌一)은 동포에게 많은 해를 끼쳐 지역민들이 모두 미워했다. 독립군은 그를 총살로 처단하기 전에 "너희는 여러 차례 타이르는 글을 보고도 조금도 뉘우침이 없으니 이제 이르러서는 용서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지방 일반 동포가 양심으로 너에게 선언한 사형을 집행하노라"라고 선고하고 처단했다(<독립신문> 1920.6.5). 몇 차례 기회를 주었지만 뉘우치지 않으므로 처단한 것이다.
오래 동안 조사해서 밀정이 확실하고 해악이 클 때는 바로 토벌했다. 김화룡(金化龍)은 일제 영사관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일찍부터 신흥학교에 대한 정보를 밀탐했는데 겉으로 독립군을 도와주는 척 위장했다. 통의부 경호부는 이 사실을 알고 그의 행동을 주시하며 조사했다. 일제 영사관과 연락해 비밀을 누설한 증거가 확실하고 부하를 데리고 다니면서 해악이 큼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통의부 5중대에서 군인을 파견해서 그 밀정 소굴을 일망타진했다(<동아일보> 1923.1.3).
왜적에게 밀고해서 독립군 작전을 좌절시키고 독립군을 희생케 한 밀정은 반드시 토벌하려 했다. 밀정 이찬식(李贊植)은 1922년 봄에 독립단이 국내진입작전을 할 때 일경에게 밀고해서 작전 중이던 독립군 9명이 전사했다. 1924년 7월에 초산군에 진입한 독립단은 군자금모집 등의 활동을 한 후에 이찬식의 집을 찾아내서 불을 질렀다(<동아일보> 1924.8.2). 광복군총영 박윤식은 국내 의주군에서 작전했는데 밀정 2명이 밀고해서 희생되었다. 이를 토벌하기 위해 광복군총영 군인 7명이 국내로 진입해서 우선 적 주재소를 공격하고 이어 밀정들이 사는 집을 습격했다(<독립신문> 1922.4.15). 밀정이 도망가서 처단하지 못했지만 독립군을 희생시킨 밀정은 토벌한다는 뜻을 보여주었다.
독립군의 국내 진입 작전은 적 기관 공격, 친일관리 처단, 군자금 모집 등 여러 목적이 있었는데 밀정 토벌이 포함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920년-1925년 '독립군의 반친일파투쟁'을 정리한 한 도표를 보면, 전체 83건 가운데 밀정(보민회·조선인회 포함) 토벌이 45건으로 54%나 된다. 친일파 토벌 작전 중 밀정 처단이 반을 넘었다. 실제 토벌 작전은 도표 건수보다 훨씬 많은데 밀정 처단이 작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도표의 통계처럼 큰 것이 확실하다. 도표에는 1921년에 밀정 3명의 토벌이 있는데 한 신문(<동아일보> 1930.4.5)에 따르면 1921년에 국내 진입 작전에서 밀정 24명을 토벌했다. 도표 통계보다 훨씬 많은 밀정 토벌이 있었다.
통의부는 1924년 10월 한 달 동안 국내 진입 작전에서 일경 28명과 친일파 32명을 토벌했는데(주7) 밀정이 다수 포함되었다. 한 기사(<동아일보> 1924.8.2)는 '빈번한 밀정 사살'이란 제목 아래 초산군 100여 리 사방에 독립단이 밀정·친일파를 총살하는 활동이 많다 했다. 밀정 토벌에 대한 전체 통계 자료는 없지만 이상의 여러 기록으로 보아 국내에 진입해 밀정을 토벌하는 작전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만주에서는 밀정·친일파 처단을 위한 단독 작전이 전개되기도 했다. 만주는 중국 군경이 관할하는 곳이라서 왜적기관일지라도 영사관 등을 공격하는 것은 어려웠다. 왜적 토벌은 주로 밀정 등의 친일파 처단 작전으로 수행되었다. 1924년 통의부 5중대는 만철연선(滿鐵沿線)의 친일파 토벌에 착수했다. 최성은 1개 대(隊)를 거느리고 개원 지방으로 가고, 김광추는 박희광, 김병현과 같이 무순·봉천 지방으로 향했다. 김광추 등은 무순에 도착해 6월 1일 고등계 밀정이자 무순민회 서기인 정갑주(鄭甲柱)를 처단했다(<동아일보> 1925.9.1). 이어 6월 7일에 거물 밀정 최정규를 토벌하려 했으나 최정규가 사실을 알고 몸을 숨겨 성공하지는 못했다.
정의부 의용군 중대장 문학빈은 참의부 부대와 의논하여 양측이 합동해서 '중국 또는 일제와 밀통해서 독립군에 손해를 끼치는 자들(밀정: 인용자)을 토벌'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5명 1대의 10개 편대를 조직해서 활동을 시작했다.(주8) 신민부는 1925년 말에 문우천, 임강 등이 회의 중 주구의 밀고로 피체된 것을 계기로 주구 조직 토벌을 결의했다. 별동대를 파견해서 해림 조선인민회 회장인 밀정 배두산(裵斗山)을 처단하고 이어 하얼빈 조선인민회를 공격했다.
만주 밀정을 처단한 독립군은 밀정과 친일파 토벌을 목적으로 편성된 특별부대의 성격이 있었다. 이를테면 후일 국민회 경호부원이 되는 김용숙, 고덕수는 1920년에 밀정 6-7명을 처단해서 '(밀정)을 죽이기로 전문하다시피' 했다(<동아일보> 1924.8.12). 실제 밀정을 많이 처단한 사람을 어릴 때 보았던 차경수는 총을 쏘지 않고 처단하는 전문 방법도 있었다고 회고(<호박꽃 나라사랑>)했다. 그의 첫 인상이 무섭게 느껴졌는데 후일 그가 애국자였음을 깨닫고 이름을 잊어 기록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위에서 본 만철연선의 밀정 토벌 작전을 주관한 통의부 5중대장은 김명봉인데 그는 대한독립단 시절부터 만주 여러 곳의 보민회를 토벌했다. 그러한 작전 경험으로 통의부 5중대는 밀정 토벌을 위한 특별대 편성이 적합했다. 신민부 별동대도 황일초, 채세윤, 최진만 등을 대원으로 하여 해림과 하얼빈의 조선인민회를 지속적으로 공격한 사실로 보아 밀정 토벌을 위해 전문화된 대오였다 하겠다.
밀정은 일제가 독립군(·진영)을 와해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양성해서 이용한 왜적의 주구였다. 밀정 때문에 많은 독립군 전사가 희생되고 작전이 실패하기도 했다. 독립군은 밀정의 침투와 정보 누설을 막기 위해 군사 보안 체제를 가동, 유지했으며, 역으로 작전의 성공을 위해 왜적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는 경로를 구축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밀정에 의한 희생을 막을 수 없었다. 독립진영의 변절자가 밀정이 된 경우 희생이 더욱 컸다.
따라서 밀정은 일제 군경처럼 토벌의 대상이었다. 항일투쟁의 한 부분으로 밀정 토벌은 친일파 토벌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했다. 경신참변 후부터 만주사변 전까지의 항일전 전략은 대규모 전투를 전망하면서 현실적으로는 소부대 단위의 유격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주재소 등의 왜적기관 공격이 정규 의용군의 전투였다면 밀정 토벌은 전투라기보다 특수 임무에 해당하는 작전이었다. 밀정의 방해가 없어야 적 기관 등의 공격작전이 성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밀정 토벌은 항일전에서 소홀히 여길 수 없는 부분이었다.
(주)
1)채영국, <<한민족의 만주독립운동과 정의부>>, 국학자료원, 2000, 209쪽.
2)위와 같음.
3)허은 구술,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1995, 35쪽.
4)위와 같음. 정해붕은 해방 후 만주 교포들이 사형시켰다.
5)박걸순, <대한통의부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1990, 244쪽.
6)강동진,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 한길사, 1980, 284-287쪽.
7)박걸순, 앞의 글, 244쪽.
8)채영국, 앞의 책, 223쪽.
◎ 오마이뉴스 이중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