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의 또 하나의 적, 밀정
독립군이 전투에서 무찌를 적은 일제 군경(軍警)뿐만이 아니었다. '밀정'도 있었다. 밀정은 대규모 전투의 대상은 아니지만 항일전의 승리를 담보하기 위해 반드시 토벌해야 했다. 밀정은 독립진영의 정보를 캐내 일제 측에 밀고하거나 일제가 독립지사를 체포·살해케 하는 데 협력하는 자들이다. 한마디로 독립운동을 방해, 파괴하는 자들이다.
독립운동, 특히 무장항일운동은 보안이 매우 중요한데 밀정은 보안망을 뚫고 들어와 작전을 실패케 하려 했다. 일제 고등관리가 된 자들이 드러난 친일파라면 밀정은 드러나지 않게 독립전쟁을 와해시키는 세력이다. 따라서 밀정 토벌은 독립군 작전의 중요 부분이기도 했다.
밀정
경술국치 후 만주·노령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강화돼가자 일제 영사관은 조선인을 채용해 밀정으로 이용했다. 이를테면 두도구(頭道溝) 영사분관은 1915년에 안대화(安大化. 창씨명 江口常作)를 통역으로 뽑아 밀정으로 뒀다. 그는 독립진영의 정보를 캐내 일제 당국에 건넸고 급기야 1919년에 단지동맹결사대 지도자 황용기를 체포케 했다('조특보제26호'). 독립진영에서는 그를 처단했다.
3.1혁명 이후 만주에서 무장대오 편제가 강화되자 일제는 조직적으로 밀정을 이용했다. 1919년 10월부터 '조선인 순사'를 만주 각 영사관에 배치했는데 그들은 사실상 독립진영의 정보를 캐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장춘(長春)에서는 일제 고등경찰 아래에서 활동했다. 그들은 독립운동 진영 상황을 몰래 캐내는 밀정이었다. 해룡(海龍)분관은 독립 진영에서 '한두 명의 거두'를 매수해서 정보를 캐내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荻野富士夫, <外務省警察史>).
이 계획은 해룡뿐만 아니라 만주 각 현의 영사 분관과 관동군도 실행했다. 관동군 참모부가 작성한 1919년 10월의 한 문서는 '관전독립지단(寬甸獨立支團) 도검찰(都檢察) 직에 있는 밀정의 보고'를 바탕으로 작성됐다('관참첩제591호'). 도검찰은 군자금·군수품 모집, 밀정 탐색, 주재소 현황 탐색 등의 활동을 하는 검찰의 책임자였다. 그런 위치에 밀정이 파고들었으니 사실상 관전 독립지단의 활동은 일제 정보망에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밀정은 돈에 경도돼 나라와 겨레를 배반했다. 1919년 길림총영사관의 '밀정비 지출 품청(稟請)의 건'에 따르면 밀정비는 월 500원으로 밀정 4인에게 1인당 월 80원을 지불하고 기타 여비와 잡비가 포함돼 있었다('기밀공제71호'). 1920년 조선인 경관의 평균 월급이 28원80전임을 감안하면(<동아일보> 1920.4.27.) 월 80원(여비, 잡비 등을 포함하면 1인당 122원이나 된다)의 보수는 고액이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간행에 관여하던 고진호(高辰昊)는 조선총독부 상해파견원에게 포섭돼 월 100원을 받기로 하고 독립진영 정보를 밀고했다(<독립신문> 1921.1.21.).
모든 밀정이 많은 월급을 받은 것은 아니다. 당시 만주의 밀정은 만주 일경의 밀정, 일제 주구단체인 보민회의 밀정, 국내 일경이 만주로 파견한 밀정 등 크게 보아 세 갈래였다.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밀정이 월 80원 정도의 고정 월급을 받지는 않았다. 왜적이 동포마을을 수색할 때는 밀정을 고용해서 하루 5원을 줬는데 이 밀정들은 5원에 동포를 적에게 팔아넘겼다(<독립신문> 1919.12.27.). 위원군의 밀정 조신화(趙信化), 이정빈(李貞彬)은 만주로 침입해 이승환의 집을 불태우고 왜적으로부터 5원을 받았다(<독립신문> 1923.6.13.). 몇 년 동안 국내 밀정이던 정운복(鄭雲復)은 입에 풀칠할 정도의 월급을 받고 생활이 곤란할 정도였다(<독립신문> 1919.11.11.).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도록 고급 정보를 제공하는 밀정은 거액의 일시불을 받았다. 예컨대 의성단 단원으로 일경에 체포됐다가 밀정이 된 승학산(承鶴山: 본명 承禎允)은 일경이 의성단 단장 편강렬을 체포하도록 돕고 1만 원을 받았다(<중외일보> 1927.8.5.).
전 의군단 군인 황용운(黃龍雲)을 일경에게 밀고해 체포하도록 도운 밀정은 120원을 받았다(<독립신문> 1923.2.7; 5.2., 주1). 독립군 지휘관과 일반 사병에 따라 밀정이 받는 돈에 차이가 있는데 돈을 노린 밀정의 밀고는 무차별하게 이뤄졌다. 월급을 받는 거물 밀정이든, 밀정 조직인 보민회 밀정이든, 현상금을 노린 사건 계획 밀정이건 만주는 돈으로 양성된 '밀정 세상'이었다. 일제 외무성과 조선총독부에서 만주 경비로 많은 금액을 지불하는데 교육·의료기관 비용 외에는 대부분이 '밀정 양성이나 직업적 친일 표방자'에게 흘러들어갔다(<동아일보> 1923.5.31.).
현상금을 노린 밀정에게 희생된 독립군 지도자는 적지 않았다. 국경 지역의 신의주에 '밀정이 제일 많다'는 풍설이 있었는데 '경찰 밀정, 세관 밀정, 전매국 밀정' 등 종류도 다양했다. 이들 밀정은 '무엇이든지 하나만 발각을 시키면 큰 수가 난다'고 하며 밀정 활동을 했다. 세관 밀정이 밀수입을 발각하면 압수 물품의 반을 받았다(<개벽> 제38호). '경찰 밀정'도 독립군 정보를 밀고해서 체포케 하면 일경이 거액의 돈을 줬다.
밀정 가운데는 돈을 받고 거짓 정보를 건네는 경우도 있었다. 돈 받고 그냥 있을 수 없어서 적당히 지어낸 정보를 제공한 것인지, 아니면 사실과 다른 풍설(風說)을 제공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일제 정보망을 교란시키려 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현재 일제 군경 정보문서 가운데 사실과 다른 내용이 적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밀정도 편차가 있었다. 이를테면 <독립신문>(1919.11.11.)에 따르면 1919년 하반기에 국경지대의 일경이 다수의 밀정을 만주로 월경시켜 정보를 탐문하게 했다. 그런데 그들은 돈을 받고 시일을 보낸 다음 국내로 돌아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보고하거나, 경우에 따라 일제 정보를 독립군에게 몰래 알려주기도 했다. 3.1혁명과 청산리전투, 경신참변의 영향으로 밀정이 독립진영으로 전향하거나 적어도 적대적이지 않은 관계로 전환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이중 밀정'도 있었다. 신명규(申明珪)는 봉천 영사관 고등계 형사의 밀정이었는데 독립단에게도 돈을 받고 일제 경찰 정보를 제공했다. 대한통의부 5중대원 박희광 등은 신명규가 제공한 정보로 악명 높은 보민회 회장 최정규(崔晶圭)를 처단하려 했다. 신명규는 사실이 드러나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동아일보> 1924.10.5.). 보민회는 '조선독립군을 토벌한다고 조선총독부의 양해를 받아 가지고 조직'됐다(<동아일보> 1925.1.15.). 회원이 독립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밀고를 하는 밀정 조직이다. 당연히 독립군의 토벌 대상이었다. 독립군은 이중 밀정을 이용해서 보민회 회장의 집 위치 정보를 받아서 공격하려 했다. 밀정을 역이용한 정보전의 승리였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보민회원이 독립군 진영에 귀순하기도 했다. 통화현 보민회지부장 이동성(李東成)은 일제 영사분관의 끄나풀이 되어 독립군 활동을 방해했다. 따라서 통화현 의용군 소대장이 그를 체포하려 했는데 그는 도망갔고, 그의 아들이 대신 체포됐다. 이동성은 일경과 함께 독립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하며 독립군에 귀순했다(<동아일보> 1923.5.5.). 그는 그나마 남은 양심이 되살아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런 경우 역시 드물었다. 대부분의 밀정은 '같은 민족이면서 돈 받고 그런 양심 없는 짓'(주2)을 계속 했다.
독립군 활동을 파괴한 밀정
독립운동의 중요 현장에서 밀정이 개입해 운동을 좌절시키고 또 많은 독립군 지도자를 희생케 했다. 먼저 '간도 15만 원 사건'. 조선은행에서 일본돈 15만 원을 만주로 운반했는데 최봉설, 임국정 등은 그것을 빼앗아서 무기를 구입하고 사관학교를 설립하려 했다.
한때 안중근 의사의 의형제였다가 일제 밀정이 된 엄인섭(嚴仁燮)은 이 사실을 알고 일제 영사관에 밀고했다. 대가는 1만 원이었다. 임국정 등은 일본 헌병대에게 붙잡혀 순국했다. 상해임시정부가 만주의 사관학교 1년 예산으로 1만 원을 계획했으므로 15만 원이면 만주·노령의 독립군 무장대오가 훨씬 강화됐을 것이다. 밀정 엄인섭이 그것을 좌절시킨 것이다. 엄인섭은 일본말을 몰라 그 뒤에 밀정에서 쫓겨났다. 만주 동포들에게 밀정이라는 욕을 듣다가 '왜놈 정탐배'로 죽는 것을 후회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최계립, <간도 십오만원 사건에 대한 사십주년을 맞으면서>).
편강렬은 1907년 이강년 의병부대의 선봉장이었고 1910년 105인 사건 때 피체돼 3년 옥살이를 했다. 이후 1923년 만주에서 의성단을 조직해 단장으로 활동했는데 밀정 승학산의 밀고로 피체돼 순국했다. 독립진영에 있던 승학산은 1920년 '제령(制令)위반'으로 복역하다 출감한 후 밀정이 됐다.
의성단에 잠입해서 비밀을 탐지했다. 1925년에 편강렬을 하얼빈 양복점으로 유인해 일경이 체포케 했다. 편강렬은 옥중에서 발병해 보석됐으나 순국했다. 밀정 승학산은 그 대가로 1만 원을 받아 2년 만에 다 쓰고 이후 독립군 행세를 하며 부호에게 돈을 뜯어내려다가 일경에게 체포됐다(<중외일보> 1927.8.5.).
오동진은 광복군총영 총영장(總營長), 통의부와 정의부의 의용군 사령장이던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지도자였다. 그의 부하가 밀정이 돼 일경에게 밀고해서 피체됐다. 김종원(金宗源)은 정통단(正統團) 사건에 관련해서 체포됐는데 평북 경찰 고등계주임 김덕기(金悳基)가 그를 밀정으로 포섭했다. 오동진은 그 사실을 모르고 김종원을 믿었다.
김종원은 오동진의 집에 자주 다니면서 신임을 얻은 뒤에 일경의 지시대로 장춘으로 오동진을 유인해서 일경이 체포하게 했다. 당시 독립운동자금이 절실했는데 금광 부호 최창학이 몇만 원을 가지고 지원하러 온다는 거짓말로 오동진을 장춘으로 유인한 것이다(<동아일보> 1928.2.11.일-13). 오동진은 옥중에서 순국했고 김종원의 그 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양세봉은 정의부 중대장이었고 만주사변 후 조선혁명군 사령장으로 중국군과 연합해 항일전을 지휘했다. 일제는 양세봉을 체포하려고 그와 알고 있던 밀정 박창해(朴昌海, 주3)를 이용했다. 박창해는 항일을 위한 군사합작문제로 중국무장단을 찾아가야 한다고 양세봉을 유인했다. 그곳에는 일본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양세봉은 투항을 거부하고 권총을 뽑아 싸우다가 전사 순국했다. 독립군은 1년 반을 추적한 끝에 박창해를 처단했다.
독립군 지도자들이 밀정의 공작으로 순국한 몇 예를 봤는데, 이로 보더라도 밀정이 항일전의 역량을 얼마나 약화시켰는지 알 수 있다. 나아가 밀정은 독립군의 대규모 희생을 가져왔다.
대표적으로 참의부의 고마령참변(古馬嶺慘變)이 있다. 참의부는 1924년에 국경을 순시하던 사이토 총독을 공격하는 등 국내 진입 작전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25년 중국 집안현 고마령에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때 일경이 불시에 습격해 2중대장 최석순과 여러 간부, 수십여 명의 군인이 전사했다. 그 회의를 밀고한 것이 밀정이었다. 홍재을(洪載乙)이란 설도 있고 참의부 다른 중대장의 밀고였다는 설도 있다. 중요한 회의 장소가 일경에게 노출되어 습격당한 것은 밀정의 밀고 때문임이 확실하다. 습격 때 앞장서 안내한 것도 밀정 이죽파(李竹坡)였다.
참의부 1소대장 장창헌도 밀정 홍인화(洪仁化)에게 희생됐다. 홍인화는 참의부 일을 도와주며 신임을 얻은 후에 내부 동향을 일경에게 보고하다가 급기야 장창헌이 강계면으로 진입해서 작전을 펼칠 때 유인하여 일경이 총살케 했다. 또 소대원이 주둔한 근거지게 가서 소대장이 위급하다고 거짓으로 유인해 매복하고 있던 일경이 공격하게 했다. 장창헌 등 3인의 독립군이 희생됐고 소대 근거지도 일경에게 파괴됐다. 이 소식을 들은 손용준(孫用俊) 등 농민 3명이 밀정의 악행에 분노해 홍인화를 곤봉으로 때려죽였다(<동아일보> 1924.8.5.; 1930.11.27.).
ⓒ 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일제 기록('기밀제34호' 등 다섯 건의 문서)을 보면 북로군정서에 최소 3명 이상의 밀정이 있었다. 2명은 밀정으로 주목받고 체포됐다가 탈출해서 일제 영사관에 밀고했다. 1명은 영사관이 파견한 밀정으로 안면 있는 사람의 소개를 거치면서 간부진에게 접근했다.
이들 밀정을 통해 북로군정서의 무장 현황, 근거지 이동 경로와 계획 등이 일제 당국에 밀고됐다. 북로군정서가 북만주에서 처음으로 사관양성소를 설립하고 강한 무장대오를 편제했기 때문에 일제의 주목과 경계가 컸고 따라서 여러 경로로 다수의 밀정을 침투시키려 했던 것이다.
1920년 말 일본군 대부대가 만주를 침략하기 전에는 밀정의 정보가 북로군정서에 직접 타격을 주진 못했다. 하지만 만주 침략 후 행군노선 등 북로군정서의 움직임이 일본군 정보망에 노출됐고, 북로군정서가 청산리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얻자('기밀제34호') 일본군은 청산리를 포위했다. 북로군정서가 청산리에서 승전한 것은 독립전쟁사에서 갖는 뜻이 크다. 다만 밀정의 밀고로 일본군의 포위망이 구축됐기 때문에 북로군정서가 택할 수 있는 작전 전술이 제한된 것은 사실이다. 밀정이 북로군정서의 군사 활동을 일정 부분 제한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밀정의 존재는 청산리전투 뒤에 북로군정서 지도부에 탐지됐다. 1922년에 북로군정서 지도자들이 영고탑에 모여 군사 활동을 논의했는데 그 가운데 다음 사항이 있었다('기밀제98호').
"군대의 행동을 부하에게 주지시켰으나 적에게 밀고하는 자가 있어 몇 차례 실패한 바 있으므로 지금 이후는 출동할 때까지 참모 이외에 알리지 않을 것."
청산리전투 후 북로군정서는 노령으로 이동했고 지휘부는 만주로 다시 건너와서 북로군정서의 '군대 행동'을 할 상황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위 언급은 청산리전투 전후의 밀정에 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 북만주에서 신민부가 결성될 때 무장대오 이름을 '보안대'로 한 것도 지역 위수를 위해 밀정에 대한 대처를 강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국민회에도 밀정이 있었다. 1919년 4월에 국민회 훈춘지부 제1회 총회가 열렸는데 그 가운데 25명의 얼굴을 알고 있는 밀정이 참석해서 회의 상황을 밀고했다('소밀공신제51호'). 다수의 회의 참석자를 알 정도였으니, 중요 정보를 캐낼 수 있는 거물 밀정이었다 하겠다.
(주)
1)독립신문에는 3인의 밀정이 언급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황용운을 밀고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 밀고를 했고 그 대가로 120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2)허은 구술,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1995, 35쪽.
3)박창해는 참의부 간부였다가 일제에 투항한 한의제(韓義濟)일 가능성이 있다. 가운데 한자만 다른 박창해(朴蒼海)가 한의제의 본명이다.
◎ 오마이뉴스 이중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