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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세계일보] 무명의 독립투사들… 기억, 그리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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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8-10 11:34 조회8,56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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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주년 8·15 광복절이 코앞이다. 이날에는 매년 일제로부터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을 기리고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때마침 나온 ‘우리

가 버린 독립운동가들’은 유관순, 김좌진 등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이 아니

라 공훈록이나 역사책 한구석에만 그 존재가 희미하게 남겨져 있을 뿐 대중

의 기억 속에선 아예 잊혀 있던 독립운동가 20명을 발굴해 소개하고 있다.


무명의 독립투사들을 기억의 전당으로 불러낸 것이다. 일본군에 맞서 직접

싸우거나 소식과 자금을 전달하고, 도피하고 피신을 돕고, 독립정신을 교육

하고, 일제의 만행을 해외에 알린 이들이다. 이들 하나하나의 활동과 투쟁이

광복이라는 열매를 만들어낸 거대한 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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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들어가 보자.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가 된 의병장 왕산 허위(1855

~1908) 선생을 아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허위 선생은 경북 구미 임은리 출

으로 평리원 재판장(대법원장), 의정부 참찬 등의 관직에 재직했다.


선생은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을 강탈당하자 의병을 모집하여 13도창의군을

창설한 뒤 의병총대장으로 1907년 일본의 심장부인 조선통감부를 공격하기

위해 선발대 300명으로 ‘서울진공작전’을 진두지휘했다.


1908년 일본헌병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 같은 해 10월21일 낮 12시 경성감

옥(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 순국했다.

선생은 교수대에서 밧줄이 목에 걸쳐져도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태

도는 당당하기만 했다.


왜승이 불경을 읽으며 명복을 빌어주려 하자 선생은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어찌 너희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겠느냐”고 꾸짖으며 거절했다. 결국 악명 높은 경성감옥의 제1

사형수가 됐다.


정부는 재산과 높은 관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공로를 인정하여 선생

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대한민국장 수훈자는 민간인

으로서는 왕산 허위, 안중근 의사 등을 비롯한 28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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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명 중에는 벽안의 외국인도 있다.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프랭크 윌리

스코필드 박사다.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일제의 잔혹상을 알린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다.


1889년 영국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스코필드 박사는 태어나자마자 어머

여의고, 캐나다 유학 시절 소아마비로 왼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는 등의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세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모교에서 강의하던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캐나다장로회의 선교사이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 생활을 위해 한국을 찾는다.


그때부터 한국을 사랑한 스코필드 박사는 본인의 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처럼

돌같이 굳은 의지와 용맹한 마음으로 핍박받는 한국인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시작 전, 거사 소식을 먼저 듣고 협력을 요청받은 유일

외국인이었다.


독립선언과 만세시위 현장을 사진으로 남겨달라는 부탁을 받은 그는기꺼이 현장

찍어 해외에 알렸을 뿐 아니라, 일제의 만행 현장을 조사해 보고서를 만들어

해외 언론에 기고했다.

일제의 비인도적 만행을 비판하던 스코필드 박사는 일본 당국의 감시와 테러 위협

까지 받게 되었고, 선교사 임기가 만료된 1920년 4월 캐나다로 귀환한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기회가 되는 대로 기고를 통해 한국의 상황을 알리

고, 일제를 비판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68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1970년 4월

12일 81세로 서거했다. 올해는 그의 서거 50주년이라 의미는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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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이완용에게 치명상을 입힌 23세 청년 독립운동가 이재명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09년 12월22일 이재명은 명동성당 앞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11시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이 성당에서 나오자 그는 칼을 들고 달

들었다.


막는 사람이 있었지만 한 번에 제압하고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고 도망가려 하자 어

등을 다시 찔렀다.


하지만 이완용은 중상을 입었지만 살아났고 의거는 실패로 돌아갔다.


명동성당에는 이날의 의거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내용은 이렇다. “이재

친일 매국노인 이완용을 척살하려 한 독립운동가다.


평북 선천 출생으로 1909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찔렀으나 복부와 어깨에 중상만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돼 이듬해 순

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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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적과 업적을 보자면 이제껏 알려지지 않던 것이 이상할

정도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이유로 잊힌 걸까.


자료가 부족하고 업적을 알릴 후손들이 없다는 것도 현실적인 이유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국외로 떠돌았는데, 특히 북한 지역이나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기록이 상당히 미비하다.


또 후손이 남아 있다면 나서서 독립유공자로 신청하고 선양사업도 할 테지만, 독립

운동가 집안은 풍비박산 나기가 일쑤여서 남은 후손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한국에

없는 경우도 많다.

책에 수록된 이들은 얼마간이라도 그 행적이 전해지고 자료가 남아 있었던 덕분에

소수의 사람들에게나마 알려질 수 있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등록된 인물만 1만5000여 명인데, 그중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

소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행적이 알려지지 않거나 북한에 남았다는 이유로 인정되지 못한 독립운동가들

도 부지 기수다.


비밀리에 활동해 논문 한쪽에 행적이 겨우 적혀 있거나 아예 어떤 사료에도 흔적이 없는

이들도 무수할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저자는 “단지 몇 명의 독립운동가를 더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독립운동가

가 기억의 저편에 파묻혀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자 함에 있다”고 출간 배경을 설명한

“그들을 기억하고 기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버린 후손인 것이며, 이 나라는 제

독립을 위해 싸운 이들을 버린 미래 없는 나라”라고 강조했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